우리 함께 천천히 걸어볼까요?
살면서 변덕 부리지 않고 오래도록 사랑해 온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계절'인 듯합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금방이라도 펑펑 눈이 쏟아질 것 같아 설레던 마음,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피어나던 입김,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 섞여 있는 봄의 냄새.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계절을 지나, 숨이 턱턱 막히는 뜨거움과 풍성한 초록, 그리고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가 반가운 여름. 저마다 가장 아름답게 물들어 빛나는 가을까지. 한 계절이 지나고 또 다른 계절이 올 때면, 그 사이에서 저는 깨닫곤 합니다. 내가 이 계절들을 참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요.
매번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갑고,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겨울을 맞이할 때는 올겨울엔 첫 번째 눈, 두 번째 눈, 그렇게 열 번째 눈까지 세고 나서 봄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실제 겨울은 제 마음 같지 않았습니다. 눈이 너무 귀한 겨울은 싫다며 투덜대면서, 어느새 저는 이미 봄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나를 깨우고, 설레고, 기뻐하고 싶어서 저는 늘 계절을 앞서 나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걷기'입니다. 저는 걷기 예찬론자예요.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수많은 말들, 그 말들 사이에 숨어 해석조차 어려운 또 다른 언어들. 셀 수 없이 흔들리면서도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던 내 안의 침묵과,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애쓰지 않는다 자위하면서도 끝내 떨쳐내지 못한 실망감까지. 이 모든 것들을 치유하는 저만의 방법이 바로 걷기입니다.
특히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혼자 걸을 때면 그간의 장면들 속에 있는 나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거든요. 그것은 내가 나를 보는 시간입니다. 타인은 없습니다. 그 길 위에는 오직 저와, 제 안의 저만이 존재합니다. 길 위의 풍경과 공기, 바람과 소리, 빛나는 색들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면 비로소 마음이 안온하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계절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계절은 흐르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데, 제 안의 계절은 멈춰버렸습니다. 봄은 시작되지 못했고, 뜨거워지지도 못했으며, 모든 색이 사라진 흑백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걷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숨을 깊게 쉬어 보세요." 누군가의 그 말에 제 숨이 얼마나 얕았는지 비로소 알았습니다. 힘껏 숨을 들이마셔 보았지만, 가슴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걷기를 시작합니다. 멈춰버린 내 안의 계절에 다시 색을 찾고, 굳게 닫힌 가슴을 열고 깊은숨을 내뱉기 위해, 저는 다시 길 위로 나섭니다.
이 연재는 계절을 잃어버렸던 제가 다시 숨 쉬기 위해 떠나는 산책의 기록입니다. 저의 이 작은 발걸음이, 저와 닮은 호흡을 가진 당신에게도 다정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천천히 걸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