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성은 약속 장소인 안가로 들어섰다.
배기각이 살해당한 바로 그곳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미 도착해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보면 가볍고 편안했지만,
어떻게 보면 섬뜩했다.
“어서 오세요, 명인성 씨. 반갑습니다.”
비서실장이 악수를 청한다.
명인성은 악수하지 않고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흘렸다.
비서실장이 먼저 입을 연다.
“모나드 시티 때문에 요즘 많이 시끄럽죠?”
“비상계엄을 아이들 노는 소리 정도로 취급하시네요.”
비서실장은 쓰게 웃는다.
그는 식은 커피를 천천히 젓는다.
“모나드 시티는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대통령의 초헌법적 결단입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이 이를 오해하고 계세요.
명인성 씨가 대통령실 홍보수석을 맡아 주신다면
그 오해를 풀고 분열된 민심도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죽은 배기각 의원을 대신해 노동자 계급에게 희망이 되어 주세요.”
명인성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단호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는 계산하지 않고, 사유합니다.
제가 말하는 사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뿌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상계엄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파괴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방식으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명인성 씨, 지금은 한가하게 정치철학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국가가 둘로 나뉠 위기예요.
위기를 안정시킬 현실적인 정치력을 보여주십시오.”
명인성은 분명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적 필요 때문에 헌법과 국민의 생명을 침해한 행동을 그냥 넘어가면,
위기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습니다.
겉보기엔 질서가 잡힌 듯해도,
사람들 마음속에는 정의가 아니라,
권력 편에 서야 한다는 잘못된 처세술이 자리 잡게 될 뿐입니다.
시민이 권력 앞에 무릎 꿇는 순간,
그 사회는 약육강식과 같은 정글의 법칙에 지배당합니다.
원칙 없는 정치가 민주시민을 잡아먹는 걸 도울 순 없습니다.”
비서실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로봇 팔의 에너지를 100%까지 끌어올린다.
“대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른다는 걸 당신도 모르지 않을 텐데?”
명인성은 짧게 비웃었다.
이내 정색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억울하게 죽은 시민들의 무덤 위에 세운 권력자의 동상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 목숨 값과 바꾼 경제 발전은 또 다른 목숨으로 갚아야 할 빚입니다.
번드르르한 말로는 이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 역사가 이러한 사실을 여러 차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우리 땅 곳곳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뼈와 살이 썩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묻혀 있습니다.
그분들 후손들의 가슴에 사무친 분노와 복수심은 또 얼마나 처절한지 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