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상처
: 승진에 영끌한 박 팀장
박 팀장은 올해도 승진 인사 명단에 올랐습니다. 조직에서 그는 최고의 인재입니다. 3년 연속 승진이라는 영광 뒤에는 상처도 적지 않습니다. 박 팀장은 KPI 점수를 위해 삶을 몽땅 쏟아부었습니다.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하고, 맨 마지막에 퇴근했으며, 팀원 업무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은 점점 쌓여 주말에도 카페로 ‘비공식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워라밸 점수가 깎일까 봐 사무실은 피했지만, 결국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무너진 삶의 균형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첫 번째로 팀원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박 팀장은 저조한 실적을 무능한 팀원 탓으로 돌렸고, 자신처럼 헌신하는 팀원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경쟁을 부추겼으나 MZ세대에게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회의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분위기는 점점 나빠졌습니다.
두 번째로 아내가 감염되었습니다. 독박 육아에 지친 아내는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박 팀장은 ‘돈 버는 나, 집안일하는 너’로 분업한다고 여겼습니다. 그에게서 이해와 사랑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이해와 사랑의 부재는 ‘이익의 언어’에 매몰된 인간의 꽉 막힌 마음을 드러냅니다. 박 팀장은 돈도, 육아도 혼자 떠맡았다는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오늘따라 아이는 더 크게 웁니다.
어떤 철학자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옳다면, 경제의 언어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경제적 존재입니다. ‘이익', '시장', '경쟁' 같은 단어가 인간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영리 추구를 위해 조직된 회사에서 좋은 인간은 효율적으로 경쟁해서 이익을 내는 인간입니다.
인간관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 또는 척도라고 합니다. 인간관은 만물의 으뜸인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인간관은 현재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가치 있다고 믿는지에 대한 신념 체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경제적 인간관은 이기심과 합리성을 동일시하는 인간관입니다. 박 팀장이 가족과 동료를 '이익 추구에 방해되는 변수'로 취급하게 만든 근본적인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목적으로 대접받아야 할 인간이 자기 이익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합리성으로 바꾸는 마법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경제학은 객관적인 통계와 논리로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현실은 온갖 변수가 뒤섞인 복잡한 카오스 그 자체입니다.
불확실성을 자기 이익으로 바꾸기 데에는 상당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일단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주문이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입니다. '다른 조건은 모두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잠깐! 다른 모든 변수는 잠시 멈춰! 우리가 정한 조건들만 고려하자"는 전제를 깔고 이론을 전개합니다. 현실이 아주 쉽고 깔끔해지는 거죠.
하지만 이 전제 때문에 경제학의 '법칙'들은 절대 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설명일 뿐이죠. 우리 삶에서 내가 지목한 것만 빼고 다른 조건 모두가 멈추는 기적 따윈 없습니다. 가족의 슬픔, 동료의 좌절, 예상치 못한 불행 등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과 행동에는 변수로 작동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제학의 언어를 아무 여과 없이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하려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요지경 같은 현실에서 경제학은 정확한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경제 이론은,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뒷수습에 동원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경제학은 세테리스 파리부스로 단순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이 가상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입니다. 경제학에선 이런 삶의 태도를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회학, 인문학, 예술 등 다른 분야에서 이렇게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합리적이란 평가는커녕 쌍욕 먹기 딱 좋겠죠. 제가 아는 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하는 건 경제학뿐입니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말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가 만든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합리적’(合理的)이라는 말은 논리나 이치에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진리에 가까운 정당성을 지닌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진리와 매우 다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합리적이란 말은 ‘특정한 관점이나 조건 아래에서는 그러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합리적’의 어원은 라틴어 ‘ratiōnābilis’에서 유래한 영어 ‘reasonable’입니다. 이를 일본에서 동양 고전을 참고해 번역한 것이 합리적이란 단어입니다. 이처럼 일본어를 매개로 한 번역어가 한국을 비롯한 다른 한자문화권으로 들어오면서, 원래 라틴어나 영어에서 뜻하던 제한적 타당성이 보편적 타당성으로 확대 해석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무튼 경제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합리적인 존재로 봅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편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관은 진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기엔 너무나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인간은 이익에 따라 합리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비합리적인 감정에 따라 결정했을 때 속 시원한 행복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공정과 정의를 자기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이타적이고 감동적인 선행을 기꺼이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만든 평평하고 뻔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경제학이 만든 세계에서 사는 가상 인간일 뿐입니다. 경제적 성과를 나의 존재 이유로 삼을 때,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켕기는 건, 이기적 인간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박 팀장의 경우처럼 동료들과의 인간관계, 아내에 대한 사랑과 이해, 자녀 양육이 주는 보람 등 말이죠. 현실에서 이기적 인간은 보통 좋은 인간보다 나쁜 인간에 더 가깝습니다.
이익이 목적이 되면 인간은 그 수단이 됩니다. 원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의 도구화라고 합니다. 내가 그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할 경우, 그들도 나를 언제든지 똑같이 취급하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머리 좋은 우리는 이미 이러한 서로의 도구화를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그에 따라 인간관계를 맺거나 끊어냅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한 결과,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그 목적마저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 누구에게도 목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둔 채 진정한 인간관계가 과연 가능할까요.
특히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유주의 경제관은 인간의 도구화를 심화시킵니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이익 극대화에 방해되는 쓸모없는 나사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배려나 사회적 안전망은 쓰레기에 투자하는 꼴이 됩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봐온 인류의 오래된 상호부조 시스템이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오늘날 가장 초라해진 것도 경제적 인간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돈 버는 데 최적화된 시스템은 함께 사는 인간적인 맛과 멋을 끊임없이 삭제하고 있습니다.
경제학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경제학을 삶의 유일한 논리로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적 인간관을 좀 제쳐두고, 행복을 원하는 인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인간관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오늘날 전혀 새로운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