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제 인간
“성과평가 시즌에는 어김없이 극도의 불안이 찾아옵니다. 결국 올해도 C등급을 받았는데, 최하위 평가를 받는 진짜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평균 이하라는 인사담당자의 말이 자꾸 생각나네요. 남들이 저 몰래 수군거리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이 느껴져요.
제가 뭔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이 심해요. 그래요, 결국 제 책임이겠죠. 누굴 탓하겠어요. 진짜 내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잉여 인간일지도 모르죠. 이런 생각이 벌써 한 달 넘도록 계속되네요. 사람들하고 점심 먹는 것도 싫고, 회의 때 제 주장을 꺼내기가 두려워요. C등급 주제에 나선다고 면박당할 것 같아 자꾸 움츠러들어요.”
오늘날 대부분의 조직은 표준화된 숫자로 인간을 평가합니다. 매년 돌아오는 성과 평가 시즌마다 우리는 목표 달성 여부, 순위, 점수에 따라 사람을 줄 세웁니다. 회사는 이렇게 인간을 측정 가능한 단위로 쪼갠 후 조직의 최소 부품으로 취급합니다.
현대에 인사평가 시스템은 단순히 인간을 줄 세울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경영학의 실용적 계산과 철학이 결합된 인간 통제의 목적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실용적 계산이란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 관리를 말합니다. 그는 표준화된 절차와 시간 측정, 세분화된 역할 분담으로 '최적 효율'을 추구했습니다. 최적 효율을 위해서는 그 사람의 개성이나 놓여진 상황은 무시합니다. 단지 얼마나 빨리, 많이, 정확하게 일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현대 경영학이 기초하고 있는 철학은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벤담, 밀)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이 잘 보여주듯, 집단 전체의 효용 극대화를 목표로 합니다. 조직은 개인의 고유성보다 1인당 생산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기업 총생산에 얼마나 기여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사람을 등급화합니다.
현대 경영학이 신봉하는 또 하나의 철학은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주의는 경쟁을 통한 우열과 그에 따른 보상을 공정하다고 믿습니다. 능력주의에서 경쟁은 자연스럽고 필수불가결한 삶의 방식입니다. 경쟁이야말로 모두를 차별 없이 정의롭게 대우하는 대자연의 법칙이라고 능력주의는 주장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논리가 한데 얽혀 오늘날 기업 조직을 움직입니다. ‘분할과 통제’(과학적 경영관리술), ‘집단 우선’(공리주의), ‘경쟁과 보상’(능력주의). 이 세 축이 결합하면서 인간성은 점점 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데이터’로 바뀝니다. 인사관리 정보는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삶의 무늬를 지우고, 인간의 등급을 생산합니다. 등급 사회에서는 인간성 본연의 행동, 생각, 감정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자기 개성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는 조직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업의 성과평가는 두 가지 전제조건을 가집니다. 첫째, 인간이란 돈과 같은 외적 보상에 의해 움직인다. 둘째, 보상에 필요한 강력한 통제와 감시가 없는 경우 기업 전체가 무너진다.
인사평가 시스템이 이해한 인간은 돈을 먹고 작동합니다. 일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하더라도 보상은 돈으로 통일됩니다. 따라서 돈으로 보상받지 못한 자율적 행동, 내적 성장, 자기실현의 욕구는 무시되곤 합니다. 나아가 이윤추구에 방해되는 내적 동기는 시스템을 망치는 오류일 뿐이므로 철저히 막아야 합니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외적 보상보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내적 의미와 그 의미가 만든 친밀한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힘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현대 기업의 평가시스템은 그 의미를 모두 돈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획일화된 평가는 인간적인 연대감, 소소한 배려, 자기 성장의 기쁨 따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환전 가능한 활동만이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이런 인사관리 시스템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측정할 수 있는 항목만을 중시하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다양한 가치가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 정신이 개성 없는 노동력으로 표백되는 것입니다.
둘째, 회사가 내세우는 지표와 점수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숫자가 된 성품은, 한 사람이 지닌 개성과 자유를 돈벌이를 위한 통제 대상으로 바뀝니다. 자유는 인간의 대표적 본성입니다. 통제 대상이 된 인간은 어떻게든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로 가득 차게 됩니다.
셋째, 상대평가에 따른 순위 경쟁은 보상의 희소성을 확보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특정 소수를 특권층으로 만듭니다. 이에 따라 대다수는 불안, 스트레스, 소외를 느낍니다. 반복된 실패와 배제는 개인적 희망과 효능감을 떨어뜨립니다. 협력 대신 각자도생의 분위기가 조직 내에 가득 찹니다.
우리는 객관성을 자랑하는 시스템 속에 살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나만의 고유한 삶의 온도와 색깔을 숨기고 속여야 할 일이 반복됩니다. 불신과 배신의 조직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러할 때야말로 우리는 단순한 수치와 등급을 넘어서 인간의 고유함과 내면의 가치 그리고 서로의 경험에 다시 주목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의 지혜입니다. 이제부터 숫자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나를 통제하고 있는 숨은 권력을 비판하고,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삶의 조건을 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