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 사회와 성과 사회에 사는 우울한 사람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현대에 권력이 외부에만 머무는 거대하고 폭력적인 억압이 아님을 역사를 분석해 보여줍니다. 보통 우리가 권력이라고 하면 왕이나 국가처럼 나를 억압하는 외부의 강력한 힘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푸코는 현대 사회의 권력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현대인들은 외부의 권력 때문에 억지로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자기 내부의 감시자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현대인은 스스로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권력이 그들의 내면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입니다.
규율 권력은 개인의 몸과 행동, 시간을 쪼개어 표준화하고, '정상성'의 범주 안에 효과적으로 사람을 가두는 촘촘한 통제 방식입니다. 권력의 눈은 어느새 우리 정신 세계에 들어와, 개인이 스스로 규율하고 통제하는 감시망의 역할을 하도록 만듭니다. 규율 권력이 만든 정상성의 범위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인, 즉 미친 사람으로 판단되어 버립니다.
내면화된 감시와 기업의 평가 시스템
현대 기업의 인사고과, 핵심 성과 지표(KPI), 등급제도는 규율 권력이 개인을 통제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항상 나를 보고 있다(파놉티콘의 원리)는 불안 속에서 스스로 회사가 원하는 '효율적 노동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재단합니다. 감시자가 없더라도, 이미 내면화된 그들의 눈이 나를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푸코가 말한 파놉티콘은 원래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입니다. 원형 건물의 중앙에는 감시탑이 있고, 죄수들이 갇힌 방들은 이 감시탑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원형 감옥의 특징은 감시탑 안에 누가 있는지 외부에서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감시받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수감자들은 규율을 지키게 됩니다.
규율 권력은 바로 이 파놉티콘의 원리를 사회 전체로 확장합니다. 기업 환경에서 상사의 눈, 동료의 평가, 성과에 따른 등급표시는 곧 중앙의 감시탑과 같습니다. 감시가 자동화되고 비인격화될수록, 통제는 더욱 완벽하게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 양식으로 녹아듭니다.
죄의식과 자율의 환상
기업의 평가시스템에서 개인은 '자신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지식과 진실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이중적 위치에 놓입니다.
C등급을 받은 한 대리가 “모두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순간이 이 규율 권력의 성공적인 작동을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효율적이고 순응적인 회사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정밀하게 규율하고 평가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오롯이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권력의 정당성을 받아들입니다. 규율 권력은 이렇게 개인에게 '죄의식'과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결함으로 돌려버립니다. 따라서 권력이나 시스템은 비판의 대상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납니다.
푸코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기업의 평가 시스템이 경영 효율을 위한 중립적인 제도가 아니라, 기득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교한 권력 장치라는 점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구성원 스스로를 길들이고 순응하게 만드는 내면화된 통제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자율'이라고 여겼던 선택과 집중의 의지는 사실 이미 권력이 세밀하게 설계하고 구축한 질서 안에서만 유효한 거짓 자유였던 것입니다. 규율 권력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교묘하고 강력한 지배 방식입니다.
종종 우리는 실적에 목매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묻곤 합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걸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푸코는 우리 사회를 '규율사회'로 진단했습니다. 규율사회는 "해야만 한다"라는 명확한 금지 명령과 외부의 감시를 통해 개인을 통제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가 이미 규율 사회 단계를 넘어섰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피로사회』에서 오늘날의 시대를 '성과사회'로 규정합니다. 더 이상 외부의 간섭이나 감시탑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무한 긍정의 구호 속에서 스스로를 해방된 존재로 느낍니다.
규율 사회의 '순종적 주체'는 성과 사회에서 '능동적인 성과 주체'로 바뀝니다. 자유롭게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 최고의 성과를 내는 것이 성과사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겉으로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지만 이 성과 주체는 외부의 감시자 대신, 내면의 감독관인 자신이 스스로를 채찍질 합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걸까?”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잔인한 착취: 내가 나를 착취하다
이것이 바로 자기 착취의 역설입니다. 푸코의 규율 권력이 외부의 권력자가 나의 내면에 잠입해 감시했다면, 성과사회에서는 '나' 자신이 '나'를 착취하는 주체이자 대상이 됩니다. 성과를 향한 무한한 압박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과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짜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달콤한 신화 아래, 휴식은 게으름이 되고, 실패는 오직 개인의 의지박약과 능력 부족으로 치부됩니다.
기업의 정교한 평가 시스템은 바로 이 자기 착취를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성과 평가를 통한 등급제도는 규율 사회의 잔재인 감시와 표준화를 은근히 유지하면서, 동시에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은 너의 능력이자 책임"이라는 성과 사회의 논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과사회의 병리: 만성적인 피로와 우울증
이처럼 끝없는 자기 착취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규율사회가 규칙을 거부한 자에게 광인(狂人)이나 범죄자의 낙인을 찍었다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Depression)과 번아웃(Burnout)의 고통을 낙오자에게 줍니다. 무한한 성과 요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개인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에 분노하고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극심한 무기력과 만성적인 피로에 빠져 삶이 무너져 버립니다.
결국 우리는 겉으로는 자유롭지만, 내면에서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폭력에 시달리며 깊은 피로와 우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암울한 것은 앞으로 빅데이터, AI, 로봇 등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 기술이 규율 권력과 성과 사회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