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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속도의 조직, 멈춘 삶의 시간 - 1

'끊임없는 연결' 속에 사라진 쉼

by life barista

리얼리티 100% 사례 ― '끊임없는 연결' 속에 사라진 쉼


윤 과장은 출근하는 내내 이메일과 회사 메신저에 응답합니다. 즉각적인 응답이 조직에 대한 헌신과 자신의 업무 능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잣대가 되었습니다. 그의 응답은 하루 종일 계속됩니다. 이메일, 슬랙, 일정표, 결재 문서 위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는 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혹시 중요한 알림을 놓치지 않았을까?" 그는 불안합니다. 불안은 업무와 비업무, 사무실과 안방의 경계를 오래전에 무너트렸습니다.

주말에도 일과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늦어. 이러다간 제출 기한도 못 맞추겠어. 이미 보고를 한 팀도 있다던데, 어쩌지." 그는 강박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습니다. 어느 순간 윤 과장은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움직이고 있구나” 깨달았습니다.


"당신, 잠꼬대 단골 대사가 뭔지 알아?" 아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윤 과장에게 물었습니다. 윤 과장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내뱉기 어렵고 동시에 미안한 말을 최대한 신중하게 말했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컨펌 부탁드립니다.” 윤 과장은 한 방 얻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습니다.

그가 세상과 동료들 그리고 스스로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건, 결국 무엇일까요?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속도에서 사라진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일지도 모릅니다.


시간관의 중요성: 누가 시간의 주인인가


시간관은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지금의 행동과 앞으로의 계획이 달라집니다. 농경사회의 시간관을 가진 농부와 현대 지식사회의 시간관을 가진 회사원의 삶을 비교해 보면 당장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농부는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사는 순환적 시간관을 가집니다. 농부는 계절의 변화, 해와 달의 움직임, 밀물과 썰물 등 반복되고 되돌아오는 자연의 리듬을 시간으로 느낍니다. 씨를 뿌리는 때와 열매를 거두는 때가 느슨하게 정해져 있고,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자연스레 쉽니다. 시간, 자연, 노동 그리고 삶이 팍팍하지 않고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런 시간관은 언제 올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것처럼 당장 어떤 성과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때란 것은, 늘 그랬던 것처럼 반드시 찾아오고야 맙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때를 기다리는 지혜와 태도입니다. 이런 기다림에는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때는 '어둑발'처럼 불투명 하지만 필연적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에 회사원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일방통행 한다고 보는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삽니다. 또한 시간은 단위별로 측정할 수 있고 저축하거나 낭비할 수 있는 자원처럼 여겨집니다. 시간 자원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효율성과 생산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하게 설계된 계획과 이에 맞춰 모든 가능성을 통제해야 원하는 결과를 제 때에 얻을 수 있습니다. 한정된 시간 자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회사원은 '9시 출근, 6시 퇴근'과 같은 정형화된 시간 위를 달리고 또 달립니다.

농경사회의 순환적 시간관이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조화와 기다림을 인간에게 가르친다면, 현대 지식사회의 직선적 시간관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분할과 통제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결국 문제는 시간의 형태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누구냐에 달려있습니다. 윤 과장의 시계는 회사의 시계와 일치하지만, 그 시간의 주인은 윤 과장 자신이 아닙니다. 그는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 관리당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9시 회의', '11시 보고서 마감', '점심시간 1시간', '오후 3시 팀 미팅'과 같이 철저하게 회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철저하게 맞춰 돌아갑니다.


윤 과장 입장에서는 조직이 정한 시간에 맞춰 성과를 내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존재감이 조직의 시간과 엮여 있는 것입니다. 제출 기한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허둥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직의 시간을 놓친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을 들들 볶습니다.


이렇듯 회사원은 삶의 감각과 자기가 주도하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자기 시간이 의미 있는 몰입,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 가족과의 저녁 등 나만의 의미와 가치로 채워지길 무의식적으로 바랍니다. 불안은 이 소박한 바람이 좌절될지도 모른다는 예견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하루에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는 윤 과장으로서는 이런 시간을 바라는 것 자체가 불온한 일이 됩니다. 회사에서는 회사 일에만 집중해야 회사원다운 법입니다.


막상 집에 와서도 삶은 말랑말랑해지지 않습니다. 업무 시간뿐만 아니라, 퇴근 후에도 윤 과장의 마음은 '내일의 미팅', '미완의 프로젝트'로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에게 빈 시간은 뭔가 놓친 것이 분명한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불안과 의심의 연속입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윤 과장은 다시 오늘의 일과를 샅샅이 수색합니다. 그럴수록 자기만의 시간은 왜소해집니다.


회사원은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존재감을 능동적으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조직의 시간은 그에게 질서와 목표를 제공하지만, 개인의 시간을 그 대가로 내놔야 합니다. 회사원의 삶이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불안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는, 삶의 목표가 누군가가 정해준 목표에 기생하기 때문입니다.


뇌와 심리의 변화: 도파민 덫에 갇힌 나


윤 과장이 잃어버린 자기 시간을 되찾는 건 몸을 쉬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오는 업무 알림과 메시지 확인은 우리 뇌를 만성적인 비상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비상 상황이기에 뇌는 항상 긴장하고 '언제든 최대한 빨리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데, 이는 교감신경계라는 우리 몸의 비상벨이 계속 켜져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뇌가 일상을 잠재적인 위험 상황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윤 과장은 이유 없이 늘 불안하고 초조한 만성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즉각적인 만족의 덫, '도파민 루프’


스마트폰 알림이나 업무 메신저에 회신할 때, 우리 뇌에서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됩니다. 도파민은 즐거움보다는 기대감이나 행동의 동기를 유발하는데, 짧고 즉각적인 보상을 제공합니다. 예컨대, "답장을 확인했다", "업무를 처리했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작은 만족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꾸 화면을 확인하는 강박적 행동을 반복합니다.

확인 → 반응 → 도파민 보상 → 다시 확인


이 반복적인 고리(루프)가 중독에 가까운 습관을 형성합니다. 그 결과 윤 과장은 한 가지 일에 오래 머무는 힘, 생각을 길게 끌고 가는 인내, 기다림의 미덕을 서서히 잃어버립니다.


집중력 상실: 지친 뇌의 'CEO'


수많은 신호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전전두엽 피질(PFC)을 혹사합니다. 전전두엽은 우리 뇌에서 CEO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충동 조절, 복잡한 문제 해결, 깊은 생각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생산, 장기적인 계획 수립 같은 중요한 일을 모두 전전두엽이 담당합니다.

잦은 알림과 업무 전환은 전전두엽에 생각해야 할 짐을 과도하게 올려놓습니다. 이를 ‘인지 부하(cognitive load)’라고 합니다. 인지 부하는 집중력과 감정 조절 기능의 급격한 저하를 일으킵니다. 전전두엽이 지치면, 우리는 모든 일에 살짝 발만 담그는 정도만 신경을 씁니다. 이른바 산만한 집중 상태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낮은 집중 상태에서는 심도 있고 창의적인 사고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감정 조절마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통제력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실시간 반응 모드에 갇힌 마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를 높여 피로감을 더 빨리 느낍니다. 피로 누적은 우울증과 극심한 소진(번아웃)의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 최근 심리학 연구의 경고입니다.

윤 과장이 끊임없이 불안을 느낀다는 건, 그의 몸과 마음이 조직의 시간에 갇힌 지 오래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이러한 불안은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능력을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 있기에 가볍게 넘겨선 안 됩니다. 윤 과장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신경 안정이 아닙니다. 그에게 시급한 건, 시간을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려놓는 철학적 회복력입니다. 철학은 자기 시간을 살리는 사유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시간’이란, 시곗바늘이 달리는 분 초가 아니라, 내가 나의 존재를 자각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순간에 감격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윤 과장이 되찾아야 할 시간도 바로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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