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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속도의 조직, 멈춘 삶의 시간 - 3

메리노프 PEACE 철학상담 사례

by life barista

5. PEACE 메리로프 철학상담 방법이란


앞서 살펴본 철학자들의 시간관은 윤 과장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철학상담 방법론 중 루이즈 메리노프(Lou Marinoff)가 제안한 ‘PEACE’로 윤 과장을 상담해 보고자 합니다. PEACE는 문제의 명확화(Problem), 감정의 인식(Emotion), 철학적 분석(Analysis), 자기성찰과 자기배려(Consideration), 결단과 실천(Engagement)의 앞 글자를 따 만든 것입니다.


PEACE는 '끊임없는 연결 속에 사라진 쉼과 존재감 상실'로 인한 윤 과장의 불안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해결책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를 통해 윤 과장은 자기 삶을 전체적으로 검토하면서 살아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서서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PEACE가 무엇인지 단계별로 알아보겠습니다.


(1) PEACE 단계별 이해


PEACE는 막연한 삶의 고통을 명확히 하고, 자기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5단계의 철학상담 방법론입니다.


① P (Problem): 문제의 명확화. 철학 상담의 첫 단계이자 전체 상담의 토대를 다지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막연한 불안이나 혼란을 구체적인 말로 표현합니다. 언어화로 문제의 핵심을 객관적으로 세상과 공유합니다. 막연한 나의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다룰 수 있는 문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② E (Emotion): 감정의 인식. 문제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 초조, 무력감, 분노 등의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며 그 원인과 깊이를 탐색합니다.


③ A (Analysis): 철학적 분석. 문제를 철학자의 관점으로 분석하여 무의식적인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찰을 얻는 단계입니다. 철학적 사유가 문제 해결의 도구로 활용됩니다.


④ C (Consideration): 자기성찰과 자기배려. 이 단계는 앞서 A(Analysis)에서 얻은 철학적 통찰을 자기 삶에 적용하고, E(Emotion) 단계에서 인지한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던지는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내담자는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재검토하고, 불안과 고통에 대한 자기 배려와 용서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⑤ E (Engagement): 결단과 실천. 가장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작은 행동이나 사고 습관의 변화를 계획하고 실천을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철학적 깨달음을 삶에 녹여내는 과정입니다.


PEACE는 단순한 상담이 아닙니다.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 전체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되짚고 ‘철학적으로 살아가기’를 실제로 연습하는 것입니다. PEACE는 삶의 회복력을 스스로 기를 수 있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사실 이런 설명만으로는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윤 과장이 잘 회복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아래에서는 윤 과장의 상황과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아렌트의 시간관을 PEACE에 직접 적용해 상담해 보겠습니다.



6. PEACE로 윤 과장 상담하기


① P (Problem): 문제의 명확화


이 단계의 핵심은 막연한 불안을 '다룰 수 있는 문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학상담가는 윤 과장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윤 과장의 말을 통해 그에게 불편을 주는 요인의 윤곽을 잡고 결국 문제의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잘 묻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지금 윤 과장님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그 '끊임없는 연결'이 정확히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나요?" (예: 하루에 받는 이메일 개수와 메신저 알림 빈도 등)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움직인다’는 깨달음이 윤 과장님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이러한 상황을 ‘삶의 주도권 상실’로 말할 수 있을까요?”
"업무와 삶의 경계가 붕괴되었다고 느낀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예: 잠꼬대 사건, 주말 내내 손톱을 물어뜯는 강박 등)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윤 과장은 자기 문제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윤 과장이 느끼는 불안과 고민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처음에는 두루뭉술했던 단어와 문장이 상담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명료해집니다.


이제 윤 과장은 출근길부터 주말까지 이메일과 메신저에 묶여 있는 행동 양식을 시간대별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일에 끊임없는 연결되어 있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쉼이 사라진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죠.


이러한 발견은 "확인 바랍니다"라는 잠꼬대에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루 수십 번의 응답과 확인은 단순한 업무상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 욕구일 수 있습니다. 이제 윤 과장은 자신의 문제가 시간 관리 문제가 아닌 존재론적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철학상담가와 윤 과장은 문제의 핵심을 ‘내면의 쉼 상실’과 ‘자기 존재감의 불안정'으로 공유하게 됩니다.


이 단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윤 과장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점을 분별하고 뚜렷한 자기표현을 갖게 됩니다.


"왜 자꾸 불안하지?"에서 "나는 내면의 쉼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의 존재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있다"라는 명확한 문장으로 문제를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명확한 문제 인식은 다음 단계인 E(Emotion, 감정 인식) 단계에서 다룰 불안, 무력감, 인정 욕구 등의 감정적 요인들과 A(Analysis, 철학적 분석)에서 적용할 철학적 개념들의 출발점이 됩니다.


② E (Emotion): 감정의 인식


E 단계에서 상담의 목적은 윤 과장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또렷이 느끼하고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입니다. 철학상담가가 감정을 직접 진단하여 주입하지 않습니다. 철학 상담에서 카운슬러는 윤 과장의 내면적 진실을 끌어내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철학상담가는 윤 과장님의 이야기("혹시 중요한 알림을 놓치지 않았을까?", "일이 나를 움직이고 있구나")와 행동(손톱 물어뜯기, 잠꼬대)에 주목하고 그 안에 담긴 핵심 감정을 언어로 재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쉴 새 없이 확인하려는 마음에 무엇인가를 놓칠 것 같은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겠네요?"처럼 넌지시 감정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윤 과장이 평소 무심히 넘겼던 감정의 이름과 의미에 대해 스스로 탐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확인해 달라는 잠꼬대는, 누구에게 무엇을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요?"
"그 불안이 가장 커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그 불안이 과장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일이 당신을 움직인다고 느꼈을 때, 그 느낌은 당신에게 무력감이었나요, 아니면 분노였나요?"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대화 과정에서 윤 과장은 상담가의 질문과 반영을 통해 막연했던 혼란을 '만성적인 초조함', '타인에게 의존하는 인정 욕구', '나의 시간 주도권을 잃은 데 대한 무력감'을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통제와 자기성찰(C 단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됩니다.


보통 감정은 신체 반응을 동반합니다. 윤 과장은 "이메일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는"경험과 "아내가 잠꼬대를 이야기했을 때 머리가 띵했던" 정서적 충격을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신체 반응의 종류와 수준에 따라 그 감정이 현재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불안, 무력감 등)이 나의 나약함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겪는 것을 나 역시 겪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 탓으로 돌리면 문제에 매몰됩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은 채, 죄책감만 커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과 문제를 분리해아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정확한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의 객관화는 철학적 분석 단계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는 첫 단추입니다.


③ A (Analysis): 철학적 분석


A 단계의 목적은 P단계에서 명확해진 문제('내면의 쉼 상실'과 '자기 존재감의 불안정')와 E단계에서 인식된 감정('만성적 초조함', '무력감', '인정 욕구')을 철학적 개념의 렌즈를 통해 분석하고, 문제의 근본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철학적 주장을 윤 과장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입하여 '나의 문제'가 '인간의 보편적 문제'임을 인식하게 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해법의 단초를 마련합니다.


- 베르그송(Bergson): '쪼개진 시간'과 '내면의 지속'


철학상담가는 윤 과장이 겪는 끊임없는 확인과 즉각 응답의 고리를 베르그송의 '쪼개진 시간'(양화된 시간, clock time)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윤 과장의 하루는 잘게 쪼개진 시간의 조각들로 굴러갑니다. 이메일 알림, 메신저창의 깜빡임, 회의 일정 팝업 같은 것들이 그의 시간을 끊임없이 두드려대죠. 겉으로 보면 그는 꼼꼼하고 성실한 직원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는 ‘5분 단위로 조각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화된 시간의 삶입니다.


이러한 윤 과장의 업무 방식은 통합된 내면의 시간 흐름을 산산조각 납니다. 이것이 '내가 일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움직인다'는 느낌, 즉 주도권 상실의 핵심 원인입니다. 철학상담가는 이 지점을 짚어냅니다.


“과장님이 주도했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요?”


베르그송의 눈으로 보면, 윤 과장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내면의 지속’, 즉 자신을 중심으로 통합된 질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숫자로 측정되지 않고, 외부에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며 벚꽃이나 단풍을 만끽할 때 흐르는 바로 그 시간입니다.


철학상담가는 '내면의 지속'(durée)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지배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 누릴 수 있는 시간의 필요성을 윤 과장이 느끼도록 대화를 이끕니다.


과장님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겼던 쉼의 경험은 언제였나요? 그 경험은 지금처럼 업무처럼 5분 단위로 흘렀나요,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흘렀나요?


이 질문은 윤 과장이 잊고 지낸 자기 삶의 속도와 리듬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윤 과장의 상황은 외부 환경 때문에 내면의 시간이 파편화된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윤 과장에게 중요한 문제는 ‘내면의 쉼’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법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 흐름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 후설(Husserl): '과거와 미래의 압박' vs. '균형 잡힌 살아 있는 현재’


철학상담가는 윤 과장의 만성적인 초조함을 후설의 시간 의식 개념을 통해 살펴봅니다. 후설은 우리가 시간을 경험할 때, 지금의 감각뿐만 아니라, 과거의 여운과 미래의 예상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감각, 여운, 예상의 균형이 무너질 때 지금의 내가 쉽게 흔들린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윤 과장이 바로 이런 불균형 상태에 있습니다. 과거의 실적 미달, 상사의 지적, 딱 한 번 있었던 보고 누락의 잔상이 여전히 그의 눈앞에 진눈깨비처럼 휘날립니다. “혹시 중요한 알림을 놓친 건 아닐까?”, “내일 행사에서 사고가 나면 어쩌지?” 같은 미래 불안 역시 그를 끊임없이 밀고 당기며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사이에서 쪼그라든 채 존재합니다. 불안과 초조함은 이 압박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입니다. 딛고 나가야 하는 현재의 징검다리가 작게 조각났으니, 그의 하루는 늘 불안하고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상담가는 여기서 ‘현재에 뿌리내리기’를 제안합니다. 과거를 억지로 지우거나 미래를 애써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견이 지금을 압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동행하도록 시간을 재배치하는 것이죠.


철학상담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과장님, 이메일을 확인할 때 예상되는 내용 때문에 불안하진 않았나요? 선생님께 혼날까봐 마지 못해 하는 숙제처럼 업무가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그렇다면 여기에 온전히 머무르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후설의 관점에서 보면, 윤 과장의 만성적 초조함은 ‘현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의 압박에 끌려다니는 의식의 상태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간 관리가 아니라 다시 현재에 발을 딛는 감각, 즉 균형 잡힌 ‘살아 있는 지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 하이데거(Heidegger): ‘타인이 정한 시간’에 갇힌 삶에서 ‘나의 본래적 시간’으로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종종 타인이 만들어 놓은 시간표 속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윤 과장의 하루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비본래적 실존’의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회사의 규칙, 상사의 속도, 동료들이 따르는 관행 등은 모두 비본래적 시간입니다. 윤 과장은 세상 사람(Das Man)이 정해 놓은 리듬에 몸을 맡긴 채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대기’, ‘즉시 응답’, ‘모두가 하니까 나도 한다’는 관성이 그의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습니다. 정작 그는 그 시간들이 자신의 선택인지, 아니면 시스템에 떠밀린 결과인지 돌아볼 틈조차 없습니다.


이런 삶은 결국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잠꼬대로 “확인 바랍니다”라고 중얼거린다는 사실은 스트레스 이상의 문제입니다. 그는 즉시 응답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누군가로부터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과장’이라는 회사에서의 역할이 그의 전부가 되어버리면서, 더 근본적인 본래적 나의 자리는 점점 더 좁고 누추해집니다.


철학상담가는 대화의 방향을 바뀝니다. 윤 과장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이나 투지가 아니라, ‘본래적 시간’을 새로 여는 일입니다. 타인이 정한 리듬에서 벗어나,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선택하고 싶고 무엇에 책임지고 싶은지를 스스로 되묻는 시간 말입니다. 이 시간은 시계가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삶 전체를 조망하고 스스로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흐릅니다. 이 시간이 윤 과장다운 그만의 시간입니다.


철학상담가는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만약 회사도 상사도 없다면, 과장님은 어떤 속도로 하루를 살고 싶으신가요?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어떤 템포로 쉬고,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 ‘가장 본래적인 윤 과장’의 모습이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드러나려면 어떤 시도부터 해볼 수 있을까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윤 과장의 문제는 절대로 ‘근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비본래적 시간 속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탓에, ‘나의 존재’가 설 자리를 잃은 실존적 위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좀 더 열심히’가 아니라,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 아렌트(Arendt): ‘끝없는 활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으로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 두 가지 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활동(Labor/Work)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에게 묻는 사유(Thinking). 윤 과장의 하루는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지금 윤 과장은 ‘멈춤 없는 활동’의 쳇바퀴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매 순간 반응해야 하고, 한순간도 비워둘 틈이 없습니다. 이런 흐름에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사라집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같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렌트가 보기에, 사유 없는 활동은 결국 기계적 반복이 되고, 사람의 내면을 서서히 닳게 만듭니다.


철학상담가는 여기서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 길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사유의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닫고, 지금 여기의 나를 바라보는 순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멈춤을 가능하게 해주는 열쇠로 아렌트의 개념, ‘탄생성(natality)’, 즉 ‘새로운 시작의 능력’을 소개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삶의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 다시 시작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새로운 나’를 불러낼 수 있고, 그 시작은 지금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결심하는 용기에서 싹을 띄웁니다.


철학상담가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과장님, 하루 중 정말 짧은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그 어떤 신호에도 대답하지 않고, 어떤 역할도 내려놓고, 오직 ‘나 자신’에게 머무르는 찰나의 멈춤이 가능할까요? 그 순간이 과장님의 삶에 어떤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아렌트가 보기에 윤 과장에게 필요한 것은 늘 해왔던 행동을 끊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조용한 멈춤의 순간입니다. 윤 과장은 그 순간에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④ C (Consideration): 자기성찰과 자기 배려


C 단계(Consideration: 자기성찰과 자기 배려)의 목적은 앞선 단계들(P, E, A)을 통해 얻은 명확한 문제 인식('내면의 쉼 상실')과 철학적 통찰('내면의 지속', '본래적 시간'의 중요성)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자기 검토에 있습니다. 철학상담가는 이제 윤 과장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배려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하도록 돕습니다. 이 단계를 자기 성찰과 자기 배려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 자기성찰: '나의 쉼'의 형태 발견하기


이 단계는 "나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행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윤 과장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휴식'이 아닌, 실제로 자기 생활을 떠올려 보면서 구체적인 행동을 모색합니다.


철학상담가는 윤 과장에게 최근에 마음이 편안했던 순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게 합니다. 실제 경험한 긴장 완화의 순간을 스스로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주말'로 표현하는 대신, '주말 아침에 휴대폰을 끄고 아내와 마신 커피 한 잔', '출퇴근길에 들었던 GD의 신곡',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했던 심호흡' 등 윤 과장의 실제 삶에 있었던 의미있는 멈춤의 순간을 찾아내도록 돕습니다.


철학상담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손톱을 물어뜯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았던 최근 순간을 딱 세 가지만 꼽아주실 수 있나요? 그 순간, 과장님의 내면의 시간은 베르그송이 말한 '쪼개진 시간'이었나요, 아니면 '지속'이었나요?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윤 과장은 산책, 명상, 가족과 대화, 음악 듣기 등 자기 '내면의 지속'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때 했던 활동들을 스스로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됩니다.


자기성찰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 감각도 함께 되살아납니다. 철학상담가는 감정의 인식 단계에서 알아챘던 신체 반응(심장 두근거림, 머리가 띵한 어지러움)과 '쉼의 순간'에 느꼈던 신체 반응을 윤 과장이 비교하도록 돕습니다. 어떤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할 때 불안이 가라앉고 몸이 이완되었는지 윤 과정이 직접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자기 배려: 가치와 우선순위의 재설정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나의 존재 가치'와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윤 과장은 하이데거의 '본래적 시간'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응답 속도'나 '업무 성과'에 달려 있지 않다고 인정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예: 가족과의 관계, 내면의 성숙과 건강 등)를 명료하게 정의합니다.


저라면 이렇게 질문할 것 같습니다.

과장님의 잠꼬대 '확인 바랍니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를 확인 바랍니다'라는 외침이었을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존재 가치를 타인의 반응에서 찾지 않고, 과장님이 스스로 정한 가치에서 찾고자 합니다. 어떤 가치가 좋을까요?


베르그송과 후설의 시간 개념을 이용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원칙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내면의 지속'을 확보하고 '살아 있는 현재'에 뿌리내리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때 자기만의 시간 확보가 의무적인 규칙이 아니라 나를 배려하는 원칙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렌트의 탄생성에 기초해 작은 성공 경험을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거창한 계획 대신, 실패 가능성이 낮은 '작은 시작'을 설계하여 '내가 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아렌트적 탄생성의 감각을 맛보게 합니다.


이를 위해 철학상담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 '내면의 지속'을 회복하기 위해, 단 5분만 투자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요? 이메일 창을 닫고 창밖을 보며 '나는 지금 나만의 시간을 선택한다'고 조용히 되뇌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시도는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성찰 일지나 감정 기록 등, 앞으로도 자신의 감정과 행동의 연결 고리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지속적인 자기 성찰 도구를 마련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C단계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윤 과장은 막연했던 불안감 대신 자신이 무엇을 회복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어떤 가치를 지키고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명확한 내적 동기와 계획을 갖게 됩니다. 다음 단계는 이 모든 통찰과 계획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E(Engagement) 단계입니다.


⑤ E (Engagement): 결단에서 실천으로 — ‘나의 시간’을 다시 살기


E 단계는 철학적 통찰을 일상의 작은 행동으로 직접 옮기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윤 과장이 다시 삶의 주도권을 손에 쥐는 과정입니다. 이제 그는 타인의 리듬에 반응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나로서 자기 시간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윤 과장은 매일 단 3분이라도 모든 알림을 끄고, 아무 목적 없는 멈춤을 갖기로 합니다. 그는 짧은 순간에 자기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내면의 리듬을 느끼거나(베르그송),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와 같은 본래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도 있습니다.(하이데거)


밤에는 “오늘 나는 나의 기준에 따라 살았는가?”라는 한 문장을 자신에게 되묻는 1분의 성찰 시간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타인의 요구가 아니라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작은 의식입니다.


결단이 감정적 다짐에 그치지 않도록, 일상의 흐름을 실제로 재배치합니다. 예를 들어 내면의 시간을 위해 매일 오후 12시 30분~35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메모지에 ‘우주와 하나 되기’라고 적고 호흡에 집중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코끝으로 느끼면서 5분간 우주로부터 받은 생명의 기운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1시간)에는 아예 스마트폰을 다른 곳에 두는 것도 좋습니다. 가족은 나의 건강과 행복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건강과 행복 또한 나에게 그렇습니다. 가족 식사 시간은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과의 가장 귀중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런 작은 행동이 꾸준히 쌓이면 삶의 감각은 달라집니다. 5분 멈춤이 잘 실천된 날, 가족과 친밀한 대화를 나눈 날에 느낀 따뜻한 감정을 짧게 기록해도 좋습니다. 이 기록은 ‘내가 내 삶을 움직이고 있다’는 삶의 주도권을 확인시켜 줍니다. 아렌트가 말한 새로운 시작, 탄생성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철학상담가는 완벽한 실행보다 ‘나를 배려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계획대로 하지 못했더라도 자책하지 않고 그 실패를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또 하나의 멈춤의 순간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기 배려는 늘 열려 있습니다. PEACE 상담의 절차와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7. 요약 및 결론: PEACE 상담법이 여는 철학적 회복


PEACE 상담법은 윤 과장의 어려움을 단순한 시간 관리나 업무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쉼과 존재감이 흔들린 실존적 문제로 바라봅니다. 현상(P)에서 감정(E), 철학적 통찰(A, C), 행동적 실천(E)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윤 과장에게 철학적 회복력, 다시 말해 삶을 스스로 재구성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일이 자신을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여는 사람으로 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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