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인간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묻는다
왜 우리의 인간관계는 이토록 어두침침한 연극 무대에 갇혀버린 걸까요? 김 대리를 '고장 난 부품'으로 본 김 부장의 눈은 인간관계의 본질을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제 엑셀 파일과 성과 지표 뒤에 숨겨진 인간관계의 진면목과 마주하기 위해, 세 명의 철학자를 사무실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하는 '타자성(Otherness)'과 '만남(Begegnung)'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김 부장은 김 대리의 ‘거래처 담당자 모친상’ 이야기를 듣고도, 그것을 ‘슬픔’이 아닌 ‘일정 지연’으로 해석했습니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김 부장을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 정도로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김 부장은 지금 타자를 보지 못하는 윤리적 실명 상태에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을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고 빠르게 단정합니다. 타자를 나의 양식장에 가두는 거죠. 김 부장이 김 대리를 ‘도달률 0.5% 부족한 인력’으로 규정한 순간, 김 대리는 자신의 고유한 감정·고통·가능성을 잃어버립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요청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에게 타자의 얼굴은 도덕적 명령이기 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인간성의 본령입니다. 만약 그 순간 김 부장이 모니터 대신 김 대리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면, ‘수리하고 오라’는 말 대신 최소한의 인간적 응답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란 바로 이 응답 가능성에서 시작됩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관계를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나-그것(I-It)’의 관계, 다른 하나는 ‘나-너(I-Thou)’의 관계입니다. ‘나-그것’은 상대를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기능, 즉 물건처럼 대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실상 인간관계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김 부장이 김 대리를 ‘엑셀 빈칸을 채우는 기계’이자 ‘고장 나면 갈아 끼우는 부품’처럼 대하는 모습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나-너’의 관계에서는 상대를 고유한 존재, 즉 대체될 수 없는 너 그 자체로 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런 인간관계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인격적으로 마주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우리는 상대의 고통, 슬픔, 기쁨이 내 맘과 몸에서 전율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의미 있길 원합니다.
부버는, 우리가 대다수 일상에서 무심코 ‘나-그것’ 관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변화와 치유는 ‘나-너’의 만남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김 대리가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존중받고 싶다”고 토로할 때 필요한 것은 ‘기능적 평가’가 아니라, 그의 목소리와 존재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내가 너의 자리였다면 어땠을지” 질문하고 경청하는 순간이 곧 ‘나-너’의 출발입니다.
부버는 말합니다. 상사와 부하도, 고객과 직원도, 심지어 나와 나 자신조차 역할과 성과를 넘어서서 만나야 한다고. 기업 조직 내 인간관계가 자꾸만 “일을 위한 관계”로 타락한다면, 그곳은 물건만 쌓인 창고와 같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너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에 주목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가 소유(갖는 것, to have) 중심으로 왜곡된 현상을 비판합니다. 그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존재(있는 것, to be)’와 ‘주는 것(to give)’에 기반한 것으로 봅니다.
프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내가 얼마나 능력·지위·물건을 갖고 있는가’로 자신과 타자를 평가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부하는 보고서를 내놓는다는 식에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바로 권력 소유에 기초한 것입니다.
프롬은 성숙한 인간관계란 상대방에게 주고, 나누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관계의 기술’을 익히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과 관계를 수동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 활동이며 기술(Art)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특히 그는 참된 관계가 다음의 네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① 보호(Care): 상대방이 성장하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살핌
② 책임(Responsibility): 상대방의 요구(정신적 요구 포함)에 기꺼이 응답하는 태도
③ 존경(Respect):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마음
④ 이해(Knowledge): 상대방의 내면 깊은 곳까지 공감하고 아는 것
이 네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볼 때,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김 부장의 태도는 ‘관계’가 아닌 것을 ‘관계’로 착각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김 부장은 월급, 회식, 인센티브 같은 외적 보상을 부하직원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롬의 관점에서 그것은 기계적인 ‘기름칠’이나 거래적 ‘교환’일 뿐, 진정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또한 김 부장은 김 대리에게 휴가를 주며 “수리 기간”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직원을 기능적 부품으로 보고 있다는 농담처럼 드러난 진심입니다. 만약 그가 관계의 기술을 이해했다면, 그 시간을 회복을 위한 여유로 이해하고, 김 대리를 보호(Care)하고 존중(Respect)했을 것입니다.
프롬에게 ‘주는 것’은 내면을 소모하거나 희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를 통해 나의 활력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진짜 ‘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관심, 이해, 책임감 등 내면의 자원을 건네는 것입니다. 김 부장이 김 대리에게 “이번 프로젝트가 네 성장에 어떤 의미였나?”라고 묻고 그가 성장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능동적 관심입니다. 타인을 돕고 성장시키는 순간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 힘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프롬의 철학은 관계를 연습해야 할 기술(skill)로 본다는 점에서 실천적입니다. 관계의 기술은 ‘갖는 것’의 욕망을 내려놓고, ‘존재하는 것’과 ‘주는 것’에 집중할 때 비로소 몸에 뱁니다. 직장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부하라는 기능적 역할을 넘어, “서로에게 어떤 성장과 경험을 건네줄 수 있는가?”를 고민할 때 팀워크와 신뢰라는 인간적 자산이 자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