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어느 여름, 경기도의 한 공장에서 금형 청소 작업이 있었습니다. 기계를 멈추지 않고 청소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건 누구나 알았습니다. 작업반장인 전준수는 관련 교육도 직접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는 늘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위에서 멈추지 말래. 그냥 하자.
어쩔 수 없잖아.”
기계를 멈추면 재가동할 때까지 작업도 멈춥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청소 시간이 윗분들에겐 있을 수 없는 생산 중단이었습니다. 윗분들의 뜻에 따라 작동중인 프레스에 자기 몸을 움직인 사람은 신입 이주노동자 하산(27세)이었습니다.
하산은 무서웠습니다. 프레스는 여전히 뜨겁고 날카롭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람 몸이 가까워지면 자동으로 정지하는 센서가 기계에 있었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고, 분명 센서가 잘 작동할 거라고 그는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더 무서운 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을 때 해고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산에겐 거부할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날도 하산은 반장의 지시에 따라 작동 중인 프레스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청소의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건, 신체 감지 센서 위에 눌어붙은 이물질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나마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하산은 오로지 자기 눈과 귀에 의지한 채 프레스의 거대한 이빨을 피해야 합니다.
센서에 착 달라붙은 먼지들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산의 안간힘은 이내 비명으로 바꿨습니다. 프레스는 하산의 팔을 덥석 물고는 그대로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피가 많이 흘렀습니다. 하산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고 조사에서 반장은 끝까지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저는…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전준수는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센서 청소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그날 작업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현장에 자기뿐이었다는 사실을.
반장은 외상 후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상담 중에 그는 계속 같은 말을 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선생님, 제가 시킨 대로만 하지 않았더라면 하산은 아직 살아 있을까요?
전준수 반장은 악마가 아닙니다. 그는 집에서는 다정한 남편과 아빠이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일 줄 아는 평범한 이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을까요?
앞서 4장에서 우리는 관료제가 인간을 ‘기능’과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관료제의 또 다른 무서운 점은 바로 ‘책임의 파편화(Fragmentation of Responsibility)’입니다. 거대한 기계 안에서 개인은 아주 작은 나사못 하나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나는 결정권자가 아니야. 나는 그저 손발일 뿐이야.”
이 생각은 달콤한 유혹입니다. 내 행동 결과가 아무리 끔찍해도, 그 원인을 ‘지시를 내린 윗분’에게 돌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대리자 상태’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충격적인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옆방에 있는 사람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그들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라.”
처음엔 약했던 전압이 나중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갔고, 옆방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의 65%가 최대치 전압까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들은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로 실험에 무작위로 지원한 것뿐입니다. 그들을 위험한 짐승처럼 만든 건, “실험을 계속하십시오. 모든 책임은 연구자인 제가 집니다”라는 권위자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권위자에게 ‘외주’ 준 것입니다.
전준수 반장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위험한 현장과 하산의 공포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뇌는 ‘도덕적 판단’을 멈추고 ‘대리인’ 모드로 전환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청소 시간이 윗분들에겐 있을 수 없는 생산 중단”이라는 회사의 논리를 내면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실현하는 ‘충실한 도구’로 격하시켰습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의 수많은 조직이 이런 ‘생각 없는 성실함’을 장려한다는 점입니다. 시스템은 질문하는 사람보다 시키는 대로 빨리 처리하는 사람에게 고과를 잘 주고 승진을 시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기계는 시키는 대로 멈추지 않고 돌아갔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기계처럼 행동하기로 ‘선택’한 순간, 그 성실함은 악(惡)을 돕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전준수 반장이 하산에게 가한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멈추지 말라’는 부당한 명령에 대해 ‘왜?’라고 묻지 않은 ‘사유(思惟)의 중단’이었습니다.
하산이 죽은 날, 공장의 프레스만 작동한 것이 아닙니다. 전준수라는 도덕적 센서가 꺼진 인간 기계도 함께 작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