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수 반장은 여전히 억울합니다. 그는 자신이 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으며, 단지 조직의 질서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하산의 죽음 이후 붕괴 직전에 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기계 소리만 들려도 식은땀을 흘립니다.
이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맺고 있는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삶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실존주의 심리치료자, 에미 반 두어젠(Emmy van Deurzen)의 상담실로 그를 안내합니다.
두어젠은 “삶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갈등과 불안을 피하지 말고 직면할 것을 권합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이 경험하는 삶의 영역을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4가지 실존적 세계
두어젠에 따르면, 우리는 동시에 네 가지 차원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강한 삶이란 이 네 가지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반대로 삶이 삐걱거리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어느 한 세계에만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특정 세계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1. 물리적 세계(Umwelt): 자연세계
우리의 몸과 환경의 세계입니다. 생존, 건강, 본능,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지만, 결국 쇠락하고 죽는다는 한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사회적 세계(Mitwelt): 공공세계
타인과 관계 맺는 세계입니다. 직장, 가족, 사회적 지위, 명예, 역할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소속감과 인정을 원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갇히거나 고독해지는 갈등을 겪습니다.
3. 심리적 세계(Eigenwelt): 사적세계
나 자신과의 관계, 즉 내면의 세계입니다. 나의 성격, 정체성,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 세계가 건강해야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4. 영적 세계(Uberwelt): 이상세계
의미와 가치, 신념의 세계입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것이 옳은 삶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도덕적 가치를 세웁니다.
전준수 반장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두어젠의 안경으로 보면, 그는 사회적 세계(조직, 지시, 생계)에만 과도하게 매몰된 나머지, 영적 세계(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고 심리적 세계(자신의 선택)를 부정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불균형이 물리적 세계(하산의 죽음, 자신의 신체 증상)의 파국을 불러온 것입니다.
전준수 반장을 위한 철학상담실
철학상담가: 반장님,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전준수: 못 잤습니다. 눈만 감으면 프레스 기계 소리가 들려서요. 억울해서 미치겠습니다. 제가 죽였습니까? 저는 시킨 대로, 회사가 지시대로 했을 뿐인데 왜 제가 살인자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① 1단계 [탐색] 사회적 세계(Mitwelt)에서 빠져나오기
: “당신은 회사의 부품입니까, 전준수입니까?”
철학상담가: 반장님은 지금 세상의 전부를 ‘회사’로만 보고 계시는군요. 두어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장님은 사회적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거기서 반장님의 존재 이유는 ‘말 잘 듣는 직원’, ‘생산성을 맞추는 반장’ 뿐입니다.
전준수: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잘리면 가족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철학상담가: 맞습니다. 생존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지키기 위해 반장님은 심리적 세계(Eigenwelt), 즉 ‘나 자신’을 지웠습니다. 회사가 시키면 위험한 줄 알면서도 묵인하는 사람, 그게 진짜 전준수 씨가 원하던 모습입니까? 반장님은 지금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 뒤에 숨어서, 자신이 비겁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겁니다.
② 2단계 [직면] 심리적 세계(Eigenwelt)의 회복
: “선택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전준수: 선택이라뇨? 저한텐 선택권이 없었다니까요!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습니까?
철학상담가: 아뇨, 반장님에겐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해고될 위험을 감수하고 기계를 멈추는 선택’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방치하는 선택’ 사이에서, 반장님은 후자를 선택하신 겁니다.
전준수: (침묵하다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상담가: 두어젠은 이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합니다. 상황 탓, 상사 탓을 하면 마음은 편하겠죠. 하지만 내 손으로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그 ‘부작위(아무것도 하지 않음)’가 하산을 죽게 했습니다. 반장님,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날, 그 시각, 그 현장에서 유일하게 상황을 바꿀 수 있었던 자유로운 존재는 오직 반장님뿐이었습니다. 그 자유를 포기한 것, 그게 반장님의 진짜 죄책감의 원인입니다.
③ 3단계 [재구성] 영적 세계(Uberwelt)의 정립
: “이제 어떤 가치를 따르시겠습니까?”
전준수: (고개를 떨구며) 네... 제가 비겁했습니다. 짤릴까 봐 무서워서, 하산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눈감았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생 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합니까?
철학상담가: 죄책감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반장님이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입니다. 기계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이제 영적 세계(Uberwelt)를 다시 세우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반장님의 삶을 이끈 가치는 ‘복종’과 ‘효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치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준수: (침묵)
철학상담가: 이제 새로운 가치를 선택하십시오. ‘시킨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동료의 생명을 내 자리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하산은 돌아올 수 없지만, 반장님의 남은 삶은 바꿀 수 있습니다.
과거의 비겁함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어떤 불이익이 와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것만이 하산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자, 반장님이 다시 잠들 수 있는 길입니다.
상담실을 나가는 전 반장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는 것은 뼈아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 뒤에 숨지 않기로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나를 둘러싼 껍데기(사회적 세계)를 뚫고 들어가 내면의 목소리(심리적 세계)를 듣고, 내가 선택한 옳은 가치(영적 세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책임지겠다는 실존적 결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