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은 이번 연말 인사 평가를 앞두고 바짝 긴장해 있습니다. 본부장 승진 대상자는 딱 두 명. 자신과 입사 동기이자 라이벌인 영업 2팀의 송 부장이었습니다. 송 부장은 넉살 좋은 성격에 실적도 좋아 김 부장에겐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번에 A 프로젝트, 송 부장이 메인으로 잡았다며? 김 부장 분발해야겠어.”
상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부장은 우연히 공용 프린터에서 송 부장이 출력해 둔 ‘A 프로젝트 최종 견적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훑어보던 김 부장의 눈이 커졌습니다. 치명적인 엑셀 수식 오류가 있었습니다. 원가 계산이 잘못되어, 이대로 계약하면 회사는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말해줘야 하나?’
김 부장은 견적서를 들고 송 부장의 자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때 송 부장이 팀원들과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 건만 성사되면 본부장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지, 하하하!”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김 부장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열등감의 뇌관을 건드렸습니다. 김 부장은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견적서를 조용히 파쇄기에 넣었습니다.
‘내가 파일을 조작한 것도 아니잖아? 이건 엄연히 저 자식 실력이야. 운도 실력이고, 실수도 실력이야. 내가 저놈을 구원해 줄 의무 따윈 없어.’
일주일 뒤, 임원보고 회의는 도살장처럼 살기가 번뜩였습니다. 상무는 잘못된 견적서를 집어 던지며 송 부장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자네 미쳤나? 이대로 계약했으면 회사 말아먹을 뻔했어! 기본도 안 된 놈이 무슨 본부장이야?”
송 부장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에 앉은 김 부장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경쟁자는 제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회식 자리에서, 축 처진 어깨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송 부장을 보며 김 부장은 체한 듯 명치가 아팠습니다. 송 부장이 김 부장에게 술을 따르며 힘없이 말했습니다.
“김 부장, 자네가 승진하게 돼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축하해.”
김 부장은 그 술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뱉은 침묵이 송 부장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은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상금을 독식할 수 있듯이, 회사라는 조직은 ‘상대평가’라는 룰을 통해 동료를 적으로 만듭니다.
“밟지 않으면, 밟힌다.”
이것이 김 부장이 26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체득한 생존 법칙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효율성을 높이는 동력으로 칭송받지만, 그 이면에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승진하려면 반드시 누군가는 탈락해야 합니다.
이 구조 속에서 김 부장은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존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되기를 강요받습니다. 송 부장의 실수는 회사의 손실로 이어지지만, 김 부장 개인에게는 이득이 되는 기형적인 구조. 이 딜레마 속에서 김 부장은 동료애 대신 생존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송 부장을 직접 해치지 않았습니다. 단지 돕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피를 묻히지 않고도 상대를 제거하는 기술을 가르칩니다. 바로 침묵과 방관이라는, 세련되고 잔인한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