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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상사와 부하는 인간관계가 아니다 - 3

거래냐, 만남이냐

by life barista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김 부장’이 있습니다. 업무 능력은 탁월하고, 성과 지표는 확실하며, 팀원들에게 보너스도 잘 챙겨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팀원들은 늘 마음이 공허하고, 김 부장 본인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김 부장은 우울증에 걸린 걸까요? 아닙니다. 그는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 세계관이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김 부장에게 적절한 상담이 있습니다. 바로 ‘현상학적 실존상담’입니다. 이름이 무지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뜯어보고(현상학), 나답게 사는 법을 찾는(실존) 치유 과정”입니다. 빈스방거와 얄롬 같은 학자들이 체계화한 이 상담은, 증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삶의 의미와 관계 맺는 방식’을 스스로 바꾸도록 돕습니다.

자, 이제 엑셀 표밖에 모르는 우리의 김 부장님을 상담실로 모셔보겠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서 상담은 시작됩니다.



김 부장을 위한 철학 상담실


철학상담가: 어서 오세요, 부장님. 표정이 어두우시네요.

김 부장: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김 대리한테 못 해준 게 뭡니까? 인사고과 A도 챙겨줬고, 한우도 먹였고, 이번에 번아웃 왔다길래 휴가도 가라고 해줬어요. “푹 쉬고 수리 잘해서 복귀하라”라고 덕담까지 했는데, 김 대리 표정이 영 찝찝하더군요. 요즘 MZ들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1단계 [진단] 마르틴 부버의 거울 비추기

: 부장님, 김 대리는 고장 난 청소기가 아닙니다.

철학상담가: 부장님, 방금 “수리(Repair)해서 오라”고 하셨죠? 그 단어에 부장님의 세계관이 숨어 있습니다. 마르틴 부버라는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군요. 부버는 인간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나-그것(I-It)’: 상대를 내 목적을 위한 도구나 물건으로 대하는 관계.

‘나-너(I-Thou)’: 상대를 대체 불가능한 인격으로 만나는 관계.


부장님은 김 대리가 퇴사를 말했을 때 무엇이 가장 걱정되셨나요? 김 대리의 ‘지친 마음’이었나요, 아니면 ‘진행률 펑크’였나요? 만약 후자라면, 부장님은 김 대리를 ‘사람(너)’이 아니라, 고장 나면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할 ‘기능(그것)’으로 대하고 계신 겁니다. 김 대리가 찝찝해한 건, 자신이 부품 취급을 받았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고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돈이나 휴가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와 친밀하게 연결된 사람의 공감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2단계 [직면] 레비나스의 충격 요법

: 보너스는 주셨지만, ‘얼굴’은 보지 않으셨군요.


김 부장: 아니, 회사에서 일만 잘하면 되지, 제가 굳이 그 친구 마음속까지 봐야 합니까? 저는 제 할 도리는 다 했다고요. 도대체 회사에서 뭘 더 바라는 겁니까.


철학상담가: 바로 그 지점이 부장님이 놓친 윤리적 맹점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얼굴은 눈코입이 아니라, ‘나에게 호소하는 상대방의 고통과 처지’입니다.

부장님은 김 대리의 ‘얼굴’을 보지 않고, ‘성과 지표’만 봤습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내 방식대로(돈, 휴가)만 처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부장님은 보상을 줌으로써 인간관계를 퉁 치려 했지만,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 또는 조치였습니다. 김 대리는, 부장님이 책임져야 할 ‘얼굴’입니다. 그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한, 부장님의 팀은 늘 텅 빈 깡통 같을 겁니다.

3단계 [처방] 에리히 프롬의 관계의 기술

: 기름칠 말고, 관심을 주세요


김 부장: (한숨)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제가 뭐 심리상담사라도 돼야 합니까?


철학상담가: 아닙니다. 리더가 되시면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과 관계가 감정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Art)’이라고 했습니다. 부장님은 그동안 관계 유지를 위해 돈으로 ‘기름칠’만 하셨어요. 이제는 기술을 쓰셔야 합니다. 프롬이 말한 4가지 기술을 처방해 드립니다.


- 보호(Care): “수리해 와” 대신 “자네가 너무 소진되지 않게 내가 업무 조정을 좀 하겠네”라고 말씀하세요.

- 책임(Responsibility): 김 대리의 침묵을 ‘반항’으로 보지 말고, ‘도움 요청’으로 읽으세요.

- 존중(Respect): 그를 부하가 아닌,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로 대우하세요.

- 이해(Knowledge): 성과만 묻지 말고 “이 프로젝트가 자네 성장에 어떤 의미가 있었나?”라고 물어보세요.

이것이 프롬이 말하는 ‘주는 것(Giving)’입니다. 돈을 주는 건 지갑이 줄어들지만, 관심을 주는 건 부장님의 내면을 풍요롭게 합니다.



상담을 마치며: 기계공에서 리더로


상담실을 나가는 김 부장의 어깨는 처져 있었지만, 표정은 사뭇 진지했습니다. 그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 쳤던 것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철학은 녹슨 생각을 갈아치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왜 인간관계가 제일 힘들까?" 혹시 여러분도 김 부장님처럼 상대를 ‘그것’으로 대하거나, ‘그의 얼굴’을 외면한 채 ‘나의 얼굴’만 보고 있는 건 아닌가요.

철학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수리하고 와"라는 말을 "얼마나 힘들었나"로 바꾸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철학상담이 우리에게 주는 작지만 중요한 삶의 변화입니다.



<부록> 인간관계의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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