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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속도의 조직, 멈춘 삶의 시간 - 2

내면의 시간 감각과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라

by life barista

‘속도의 시대’를 통과하는 네 개의 사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존재의 시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 합니다. 철학자들은 째깍째깍 움직이는 물리적 시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간관을 주장해 왔습니다. 여기서는 존재의 시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앙리 베르그송,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가 말한 시간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시간은 내면에서 이어져 있다 (베르그송)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간을 초·분·시와 같은 분할된 시계 운동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살아 있는 진정한 시간은 ‘지속’이라는 내면의 시간입니다. 지속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흐르는 질적 시간입니다. 지속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며, 순간마다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여유 있게 산책하거나 오랜 친구와 정감 어린 대화를 나눌 때를 떠올려 보세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냐며 깜짝 놀랍니다.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지는 거죠. 반대로 매우 지루한 회의나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는 10분이 10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이처럼 똑같은 시계상의 시간이지만, 우리의 내면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밀도, 흐름, 감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릴 적 방학 때, 오전 늦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엔 친구와 물놀이하다가 저녁에 가족과 수박을 먹었던 아기자기하고 알콩달콩한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 지금의 감정, 내일에 대한 기대가 한데 섞여 ‘아, 오늘 참 좋은 하루였구나’ 하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입니다.


윤 과장이 일상에서 일에 치여 사는 건 넘쳐나는 잡무와 알림이 그의 내면의 시간을 깨진 유리장처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신저 알림, 5분 단위로 쪼개진 회의 시간, 그리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불안감이 그의 의식을 조각내어, 정작 자기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잃게 만듭니다. 반대로, 어릴 적 추억 속 하루는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준다는 느낌, 즉 자기 삶이 소중한 의미와 가치로 둘러싸여 있다는 감각을 줍니다.


(2) 현재를 되찾아야 시간 전체를 회복할 수 있다 (후설)


후설(Edmund Husserl)은 의식이 항상 어떤 대상에 향해 있다는 ‘지향성’으로 시간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지금’만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잔향과 미래의 기대가 늘 현재에 함께 들어와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을 인식하는 ‘현재 의식’은 이미 과거와 미래의 시간 구조를 품고 있는 ‘살아 있는 현재(lebendige Gegenwart)’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를 떠올려 보세요. 오늘 출근길에 ‘지난주 발표 때 실수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맴돌고, 동시에 ‘오늘 오전에 있을 중요한 미팅’ 때문에 긴장이 됩니다. 겉보기엔 지금이라는 시간 위를 걷고 있지는 것 같지만, 실제 의식에서는 이미 과거의 자책과 미래 걱정이 함께 들어와 있습니다. 퇴근길 집에 가면서도 끝내지 못한 자료와 내일 상사의 요청이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떠오르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우리의 현재는 단순히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이 따라붙고, 앞으로 벌어질 일이 미리 내 의식에 들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후설은 바로 이런 시간의 구조를 강조합니다. ‘살아 있는 현재’란, 과거·미래가 적당한 비율로 어우러져 내 현재의 리듬을 만들어 주는 시간입니다.


직장인의 경우, ‘과거: 실적 부담·미완 업무의 압박’이 과하게 떠오르고, ‘미래: 쏟아질 요구와 예측 불안’이 이미 현재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다 보니, 정작 자신만의 평온하거나 몰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재가 사라져 버립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저녁 약속을 잡고 식당에서 이야기하던 중에도, 갑자기 “내일 회의 준비를 안 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지금이 즐거워도 마음이 불안해지고 집중이 힘들어집니다. 반대로, 맛있는 식사를 하며 좋은 추억을 떠올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도 적절하게 품을 때, 우리는 내 삶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깊이 있는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후설의 통찰은 현재가 ‘과거의 압박과 미래의 불안’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을 경계하고, 내 삶의 주도적 리듬을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현재’를 의식적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진정한 회복은, 바로 이 현재 안에서 과거와 미래를 조절하고 균형 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윤 과장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균형 잡힌 현재 의식'입니다.


(3) 인간은 시간을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여는 존재이다 (하이데거)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자(현존재, Dasein)’로 봅니다. 그는 시간을 비본래적 시간과 본래적 시간으로 구분합니다. 비본래적 시간은 마감, 응답, 일정 등 외부에서 주어진 시간으로, 대부분의 현대인은 여기에 묶여 ‘해야 할 일’에만 반응하며 살아갑니다. 예컨대, 아침부터 보고서, 회의, 메신저, 행사 일정 등을 챙기며 시계와 달력에 쫓기는 거죠. 이때 “나는 왜 바쁜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뭔가?”처럼 자기 존재에 관한 질문은 좀처럼 떠올리지 못합니다.


반면, 본래적 시간은 이런 외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과 의미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퇴근길이나 잠깐의 휴식, 혹은 진솔한 대화 속에서 “내가 사는 이유는?”, “이 일은 내 삶에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순간이 바로 본래적 시간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회복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스스로 멈춰 서서 자기 삶의 방향과 의미를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이때 우리는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간’을 열며,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됩니다. 내가 나의 시간을 선택하지 못하면, 우리는 남이 결정한 시간에 맞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이데거가 윤 과장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존재가 아니라,

순간순간 시간을 스스로 열며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4) 멈춤의 순간에서 삶의 '새로운 시작'을 열어라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우리의 삶을 ‘활동적 삶’과 ‘사유적 삶’으로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중요하게 여긴 것은 눈에 보이는 활동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생각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일하고 반응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치 멈출 수 없는 기계처럼 말이죠. 아렌트는 우리가 이렇게 '멈추지 않는' 삶에 깊이 빠져들수록, 스스로 생각할 능력,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잃어버린다고 경고합니다.


아렌트에게 '생각(사유)'이란 시험 문제를 푸는 '두뇌 활동'이나 효율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자동적인 흐름을 일시 정지시키는 결단의 시간입니다.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에게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라고 묻는 순간 그 자체입니다.


이 '멈춤'이야말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 개념인 탄생성(Natality)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탄생성은 인간이 과거의 습관과 실패를 그저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아렌트의 희망적인 철학 개념입니다. 단조로운 일상이 정해진 길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 고요한 사유의 순간을 통해 삶의 궤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침 출근길, 커피 한 잔을 들고 잠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3분의 시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짧은 순간. 아렌트는 이 사소한 '멈춤' 속에 세계를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멈춤은 결코 게으름이나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새로움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만의 능력, 즉 자유를 실천하는 가장 인간적인 행동입니다.


만약 윤 과장이 바쁜 업무 중에 5분간 의자에 기대앉아 이유 없이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그 순간 그는 단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궤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탄생적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아렌트가 제시하는 시간관은 현대인의 파편화된 삶에 대한 강력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베르그송은 시계의 시간이 아닌 '지속'이라는 내면의 질적 시간을 회복해야 삶이 하나로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후설은 과거의 압박과 미래의 불안에 점령당한 현재 의식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가 균형 잡힌 '살아 있는 현재'를 되찾으라 촉구합니다. 하이데거는 타인이 정한 비본래적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본래적 시간'을 스스로 열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아렌트는 일상의 흐름을 '멈추고 사유하는 순간'을 통해 '탄생성'을 실현하고, 언제든 삶을 새롭게 시작할 자유를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멈춤'과 '사유'를 통해 내면의 시간 감각과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 쪼개진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연결된 삶을 되찾는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3장 시간에 대한 4명의 철학자들의 주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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