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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May 17. 2021

25 인간의 조건-자유는 생명수

독재자들의 야망     


가수가 목소리를 가다듬 듯, 팀장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나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임금노동자다. 이런 내가 생계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 잘못인가? 모든 생각이 생계 안정을 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사실 내가 실직하면 누가 나와 가족들을 보살펴 줄까? 이 냉정한 사회에서 누구 하나 우리 가족을 거들떠보기나 할까?’     


이런 든든한 반대 논리로 재무장하고 이팀장은 다시 책을 읽어 나갔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이팀장은 아래 문단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스에서 모든 독재자들의 야은 시민들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비생산적인 공론과 정치로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게 하며, 동양의 전제군주제의 바자(bazaar, 시장)와 비슷한 가게들의 집합소로 아고라를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이팀장은 어리둥절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비생산적인 공론과 정치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뜻인가? 비생산적인 짓은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는데, 한나 아렌트는 지금 무슨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천천히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연결해 봤다.  

    

악의 근본적 원인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건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목숨 챙기는데만 급급하단 의미다. 인간은 생계, 효율성, 생산성, 수익률, 전략 등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활동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이고 그 대표적인 영역이 정치다. 정치? 아, 정치.....  



인간 조건의 핵심, 생각의 자유!     


한나 아렌트는 노동 이외에도 ‘작업’과 ‘행위’를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팀장은 책을 읽어가면서 작업과 행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작업은 최종생산물을 목표로 삼는 활동이다. 따라서 작업의 모든 것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적절하고 쓸모 있느냐로만 평가된다. 한편, ‘행위’는 생계에 묶인 노동이나, 최종생산물에 집착하는 작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이웃과 나누는 활동이다. 노동, 작업, 행위로 나갈수록 인간이 보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   

   

생존에 꽁꽁 묶인 노동과 최종결과물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작업에도 물론 인간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노동과 작업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라기보다는 상품화되고 평가절하된 것에 불과했다. 인간 사유의 특징 중 하나는 자유다. 사람의 뜻과 생각은 몇 마디 가난한 설명으로 해명될 수 없다. 주머니 속 동전처럼 가지고 놀 수도 없다. 힘찬 물줄기처럼 거침없이 흘러나가는 인간 정신의 거대한 폭포를 한나 아렌트는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 정신의 거대한 폭포를 보지 못한 자 중 누군가는 독가스 밸브를 아무 생각 없이 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간의 조건은 바로 ‘행위’다. 인간 정신은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자유를 향한다. 그녀는 진정 자유로운 생각들이 반드시 정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공동체적 관점에서 펼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기도 하다. 생계를 넘어서는 가치, 돈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토론과 설득의 과정은 우리가 함께 모여 사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이것을 잃어버린 사람은 인간의 조건 중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린 셈이다.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이팀장은 정치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활동을 통해 재산을 늘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노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정치는 직업적 정치가 아니다. 그녀에게 정치는 공동체와 이웃을 향해 말하고 행동하는 활동이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인격이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드러난다. 같이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이웃과 함께 국가, 공정, 정의, 자유, 평등 나아가 행복을 이야기하는 공적 활동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이팀장은 자신이 우울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베트남 공장은 오직 경제 활동으로서만 남아 있었다. 이곳은 돈의 사막이다. 효율성과 생산성이 뙤약볕처럼 내리쬔다. 여기서 버틸 수 있도록 만드는 오아시스는 생계 안정뿐이다. 그나마 그걸 확인시켜 줄수 있는 가족마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울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돈 이외의 가치를 가슴에 담을 수도 없었다. 근로자들의 정신 건강이나 베트남 노동자들의 인권 등은 금지어였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야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월급쟁이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나서나. 이팀장은 얼른 꼬리를 내리곤 했다.     


이팀장은 책을 덮고 생각했다. AI, 스마트팩토리, 메타버스 등 기술과 결합된 상품들이 독재자처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오늘날, 자신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과연 그것을 해낼 수 있기나 한 건지 답답했다. 시민이 되지 말고 소비자가 되라, 국민이 되지 말고 고객이 되라는 곳은 더이상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따뜻한 곳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들이 그런 냉골에서 교육받고 평생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마저 얼어 붙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수 없는 묘한 힘을 가졌다. 이팀장의 가슴 한 쪽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돈 버는 일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어떤 것들은 자신이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다는 자책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칼처럼 섰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국가와 이웃 속에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나와 공동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아이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이팀장은 이런 주제를 놓고 아이들 그리고 아내와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가족 안에서 출발해 이웃과 국가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땅에 박혀 있던 고개를 조금이나마 들 수 있었다.     


이제라도 제 앞길만 살피는 공부와 일에서 벗어나, 조금 큰 생각들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어졌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디서 하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하게 되어 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 모습으로 하게 되어 있다. 이팀장은 이런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가족들의 얼굴을 보면서, 저녁 식탁에서 하고 싶어졌다. 밥줄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거짓 협박에 속아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가족들을 등진 채 더 이상 돈의 사막을 혼자 걷고 싶지 않았다. 이팀장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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