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세 개, 사람은 네 명
숫자가 맞지 않았다. 신체는 이미 성년인 여고생 둘을 작은 방 하나에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둘이서 깔깔대고 웃다가 잠들 나이가 훌쩍 지난 것이다. 영장류의 영역 본능이 자매의 인연을 끊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매의 싸우는 소리가 거실을 지나 발코니까지 넘었다. 이건 각자의 몸과 생각이 쉬고 회복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싸이렌 소리였다. 유과장 부부 모두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덕분에 남편은 서재를 내놓아야 했다. 말이 서재지 1평이 조금 넘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다. 게다가 계절 물건도 한자리 차지하는 창고 겸용 방. 남편은 애지중지했던 책들을 버리거나 팔았다.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둘째 딸은 행복했고, 남편은 막내 방 꾸미기라는 노동으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간신히 감추고 있었다. 유과장이 남편의 심사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한편, 유과장만의 방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입사지원에서 몇 번 떨어졌는지 까먹은 어느 날 아침, 한 중소기업에서 합격문자를 받았다. 그것도 과장으로! 유과장은 엉엉 울었다. 이제 간신히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유과장으로서는 기대보단 두려움이 컸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오직 공부밖엔 없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가족이라고 하더니 각자 지들 생각만 하는 이기적 동물들. 이 와중에 다시 자기만의 서재 타령하는 남편. 유과장은 잔뜩 뿔이 났다. 그 뿔의 첫 희생자가 남편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각자의 방을 가지게 된 딸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선물했다. 나름 그 방이 갖는 의미를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았고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책에서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읽기 시작한 건 유과장이었다.
아내를 구타할 수 있는 남편의 권리
『자기만의 방』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대한 강연이다. 강연 요청을 받은 버지니아 울프는 고민에 빠진다. 여성과 픽션? 이건 여성이 쓴 픽션인가? 아니면 여성에 대해 쓴 픽션인가? 그녀의 결론은 다소 엉뚱하다. 그 결론이란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나’를 등장시킨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강연을 준비하는 나는 대학 도서관에 들어가지 못한다. 관리인 왈, 여성은 대학연구원과 함께 오거나 소개장이 없으면 절대로 대학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별은 곳곳에 존재한다. 식사 때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만, 여성은 물을 마신다. 남성은 탐욕적으로 부유하고, 여성은 비참하게 가난하다. 여성은 갖은 노력으로 노동하지만 돈을 소유할 합법적인 권리조차 없었다. 심지어 『영국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아내에 대한 구타는 남성의 공인된 권리였고, 상층민이나 하층민이나 할 것이 자행했다. 부모가 선택한 신사와 결혼하기를 거부하는 딸을 방에 가두고 구타하며 내동댕이친다고 해도 전혀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유과장은 버지니아 울프가 왜 여성과 픽션이라는 강연을 자기만의 방과 정기적인 수입을 통해 풀어나갔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픽션은 거미집과 같아서 아주 미세하게라도 구석구석 현실의 삶에 부착"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건 재능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소설을 쓰는 사람이 어린 시절 어떤 경험과 교육을 받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리고 현재 소설을 쓸 수 있는 공간과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지에 따라 소설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권리도 없는 여성, 15~16세에 결혼해 가사노동으로 늙어가는 여성, 남편의 구타를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여성, 이들이 과연 어떤 소설을 쓸 수 있는가?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는 재능을 갖는 건 불가능?
한 주교는 신문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과거든 현재든 또 미래든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녀의 이름은 주디스다. 주디스는 오빠인 셰익스피어에게 뒤지지 않는 문학적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디스는 오빠처럼 문법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책을 읽을 수도, 사냥이나 말타기를 할 수도,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도 없었다. 부모와 사회는 그녀의 삶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바느질과 국을 끓이는 일이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연극을 하기 위해 오빠처럼 가출했지만, 오빠처럼 연극 단원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조롱거리가 된다. 쉼 없이 노력해 보지만 여자라는 치명적인 약점은 그녀를 동정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든다. 주디스는 극단 단장의 동정으로 먹고 살다 그의 아이를 갖는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오빠와 같은 문학적 천재성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몸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꽁꽁 얼어붙은 길모퉁이에 묻힌다.
유과장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경험했던 남녀차별은 "원래 다 그런 거지.", "나 하나 참으면 조용히 넘어가는 일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왜 유난을 떨어." 하면서 대충 넘길 일이 아니었다. 차별은 누군가에겐 삶을 스스로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자기 몸에 새겨진 차별의 문신이 이제 서야 상처라는 걸 알았다.
두 딸의 얼굴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