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8세 12월 겨울이었던 그날의 기억
어느 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꽤 오랜 시간 생각해 왔다.
산다는 건 무엇이고 죽음에 이르면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있긴 할까?
그런 생각들.
살아가다가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날이 떠오른다.
고3 시절 겨울이던 12월이었다.
만 18세의 끝자락에 놓여 있던 어느 날.
그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망쳐본 날이다.
나는 아주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학교 집 학원 독서실 루틴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고
초중고 내내 학교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지각과 결석을 한 적 없었고,
하다못해 아파서 병결을 한다던가 조퇴조차 한 적이 없었다.
교실 내에서 나는 조용하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책 읽고 있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적당한 치마길이에
보통의 여고생들의 머리였던 염색하지 않은 긴 생머리를 가진
정말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고3 때 나는 역시 조용했다.
집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입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고요했던 것 같다.
미대를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11월 수능이 끝나고
12월 학교에 출석체크를 하고 미술학원을 가서
1월의 실기 시험을 준비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런 평범한 12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학교도 학원도 집에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사라졌다.
등교하는 길에 정말 불현듯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한강을 갔던 기억이 있다.
막상 한강을 가니 너무 평화로웠다.
그날은 12월 겨울이었고
어쩐지 아직 첫눈이 안 온 것 같은데
사실 입시학원에 박혀 있느라 첫눈이 내렸었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나날이었다.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죽으면 괜찮아질까
한강 앞 벤치에 앉아 혼자 별 생각이 다 들던 그때
순간 또 깨달았다.
지금 나는 학교도 학원도 집도 어디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연락할 친구조차 없었다.
그냥 아무도 나의 상황을 알고 있지 않았다.
내가 왜 한강에 왔는지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내 곧 허무해졌다.
말할 수도 토해낼 수도 없는
답답한 기분.
그래서 귀에 이어폰을 꽂아 노래를 들었다.
한강을 바라보면서.
듣고 있던 노래가사가 위로가 되었다.
사라지려 하지 말라는 말이
그저 곁에 있어달라는 말이
정말 그냥 노래가사뿐인데 왜 그렇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이없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덧 사라졌다.
일단 죽지는 않을 건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땡땡이를 친 거라 갑자기 걱정되었다.
집 가면 뭐라고 하지?
학교는, 학원은...?
그렇게 한창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밖에서 방황을 하다가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고
집은 가야지 하고 집에 가는 길에
비행기모드로 해놓고 전원을 꺼놨던 핸드폰을 다시 켜니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와 카톡들이 쌓여 있었다.
해가 다 지고 난 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물었다.
학원은 왜 안 간 거야?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정말 안 그러던 애가 왜 갑자기 그랬지? 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냥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는 너무 강렬한데
가까운 누구도 알지 못해서
정말 나만 기억하는 날이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아무도 내가 죽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모른다.
아직도 12월 겨울에
한강을 가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떤 기억들은 너무 강렬한 나머지 파편처럼
머리에 박혀 남아있는데
마치 심장에 박힌 것처럼
떠오를 때는 가슴이 아프다.
또 어떤 날은
심장이 뛰는데 내가 왜 심장이 요동치는지 영문조차 모른다.
그래서 기억을 뒤집어 보면
잊고 있었던 파편이 발견되는 것이다.
아마 살아가면서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는 날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기억되는 것이다.
만약에 전생이 존재한다면
나는 전생에 어떤 죄를 지었기에
현생의 아픈 기억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