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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Feb 28. 2020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진리의 다면성

운명은 정해져 있다. 단지 알 수 없을 뿐이다.


 운명이란 없다. 삶은 선택의 연속으로 만들어질 뿐이다.


이 두 가지 주장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상극(相剋)이다. 그런데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필연과 우연, 선과 악과 같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이 결국 서로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도무지 말장난 같은 이 말은 어떻게 가능할까?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과 우연적 선택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각각 필연성과 우연성을 말한다.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필연성과 우연성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바로 주사위 게임이다. 주사위는 정육면체로 6개의 면을 가지고 있다. 던져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모두 6가지다. 따라서 하나의 주사위가 더해질수록 6의 거듭제곱만큼 경우의 수는 증가한다. 주사위 두 개를 던질 때는 36가지(6X6)이지만 주사위 15개를 던질 경우 사천억(470,184,984,576)개라는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가 나온다. 대략 100개 정도가 되면 어떻게 읽는지조차 알 수 없는 큰 숫자가 나온다. 0의 자릿수가 77개에 달한다. 그리고 어떤 숫자가 조합될지는 주사위가 던져진 상태에서 우연히 결정될 뿐이다. 우리 삶도 주사위 모양과 눈처럼 한정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특성이다. 그러나 던져진 후 바닥에 놓인 주사위 눈은 우연하게 결정된 결과일 뿐이다. 필연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우연성이다. 또한 던져진 상태에서 우연히 결정된다 하더라도 결국 6개의 눈금을 갖는 주사위의 조합이라는 필연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연 속에 내재하는 필연성이다



필연과 우연, 선과 악,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이처럼 주사위를 던지는 게임 속에는 필연과 우연이 함께 존재한다. 결정될 숫자가 가지는 우연성은 주사위 눈과 모양이라는 필연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사위 눈과 모양은 또한 우연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 앞서 운명에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다. 단지 어느 한 면으로만 본다면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면에서는 우연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이 결국 동일한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진리의 다면성이다. 자신이 보고 있는 방향, 즉 관점에 따라 달라 보일 뿐이다. 각자 자신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같은 코끼리라 할지라도 완전히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한 개념도 그렇다. 극한의 선은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가? 2001년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던 9.11테러는 누군가에게는 극단에 가까운 선이었다. 테러로 수많은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은 모두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어느 집단안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 극한의 선행은, 그러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한 행위 중 하나일 뿐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일이다.



신념으로부터의 자유


선과 악, 우연과 필연이 진리가 가진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믿고 있는 신념이나 사상 역시 진리가 가진 어느 한 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신념이나 사상이 삶에서 목적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삶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사상과 신념은 삶과 생명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삶 속에서 주인 자리를 신념이나 신앙에게 양보하는 것은 곧 신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상과 신념의 잔인한 수행자인 것이다. 극한의 선이면서 동시에 타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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