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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Jan 21. 2020

우리도 한때 그랬다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용기

비가 오면 우리 장군님 상이 젖는단 말입니다.
<2003년, 북한 응원단>
 

2003 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북한 응원단이 방한했다. 며칠 후 그들이 통곡하는 장면이 신문에 크게 실렸다. 김정일 위원장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이 비에 젖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사건은 한동안 언론에게는 좋은 뉴스거리였다. 세뇌 정치와 폐쇄 국가의 전형이라고 떠들었다. 그런데 우리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특정 대통령에게 결코 부족하지 않은 광신적인 열성을 보냈던 적이 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사진과 기사(대한뉴스 제54호 내용 요약*)를 보자.

 84회 탄신일 축하 기념식 (사진 속 인물만 아니면 평양에서 열린 행사 같다) / 출처-국가기록원
(...)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행정부의 최고 결정권자이다. 그뿐이다. 물론 대단한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건 틀림없으나 삶과 생명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념이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북한 응원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주변에는 자신이 가진 사상이나 신념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인 것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사상과 신념 자체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어떠한 행동이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과 신념이 곧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패가 되고 피난처가 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을 이교도의 학문이라 하여 당대 뛰어난 학자였던 히파티아를 잔인하게 죽인 키릴루스가 오히려 신앙을 지켰다는 이유로 성인 반열에 오른 경우도 있다. 종교 창시자와 그 제자들처럼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수도원 사람들(프란치스코 수도원 영적 수련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모든 교회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빙자한 탐욕스러운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단지 특정 사상이나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상이나 신앙을 앞세운 탐욕스러운 인간 무리들뿐만 아니라 맹목적 믿음 때문에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어떠한 이념과 정신 그리고 종교적 신앙 아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해당 사상이나 신념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혹은 다른 색안경을 쓰고 있을 때다.



배타적 신념과 사상은 곧 정신의 죽음

 

모든 생명은 유연하게 시작된다. 태아는 머리뼈조차도 유연하다. 그 때문에 자궁을 통과하여 자기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 생명은 평생 동안 경직되는 과정을 살아간다. 그래서 죽음은 마지막이자 완벽한 경직 상태인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데 집중한다. 점차 사회 관습이나 교육 그리고 경험에 따라 자신만의 신념이나 사상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을 배척하는 경직된 정신은 곧 정신의 사망과 같은 것이다.


경직된 정신은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강인한 정신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강인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자신만의 색안경으로 보고 있는 것뿐이다. 오히려 안경을 벗고 실재 세계가 어떤지 볼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주변에 있는 다양한 실재를 맨눈으로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용기야 말로 강인한 정신이다.




<참고문헌>

*국가기록원 - (www.archives.go.kr)

*대한뉴스 제54호 요약글 인용 - (www.nocutnews.co.kr/news/4435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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