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들불 Dec 31. 2023

저녁의 구애

편혜영 단편 소설의 단상

'김'은 왜 그 시간에 구애를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김’이 어두워진 국도를 걷고 있는 동안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 혹은 배경이.


구애를 하게 되는 과정은 전화를 걸어온 여자에게 김이 (얼떨결에 그러나 오랫동안 상상했던) 이별을 말하면서 시작된다.  


여자가 되물었다. 뭐가 여기까지예요? 재촉하는 여자에게 그가 대답했다. 우리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거요.


김은 끊임없이 이별을 마음속에 쌓아 왔고, 그래서 그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반대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덩치 큰 차가 지나갈 때 마치 지진이 났을 때와 같은 두려움 혹은 공포감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덩치 큰 차가 한 대 지나가면서 지표가 흔들렸고 요란한 바람이 불고 시커먼 매연이 쏟아진 후로 도로는 내내 잠잠했다.  


흔들리는 지표, 요란한 바람, 시커먼 매연 그리고 잠잠해진 도로. 이것은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과도 같다. 지진은 언제 어느 도시에서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정적이고 반복적인 것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여자와의 유대가 끊어져버린 그의 마음과 같이.


잠시 후 잠잠해진 도로에서 저 멀리 다가오는 작고 흰 점과 마주친다.


세 대의 담배를 잇달아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가 앉아 있는 쪽으로 뭔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작고 흰 점이었다. 점은 계속 움직였고 점차 커졌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불분명한 형체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흰색 운동복이었다. 가슴과 등에 숫자가 적힌 번호판을 단 마라토너였다. 그가 곁을 지나갈 때 후후 하하 하고 코와 입을 통해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안정적인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마라토너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안정적인 숨소리’는 곧 예측가능한 사건의 반복적인 순환이다. 큰 지진을 겪었던 이 도시에 오기 전까지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순조’롭기에 ‘전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기도 하다. 마치 예측불가능한 지진이나 쓰나미 역시 자신과는 상관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러나 지진을 겪는 듯한 공포감과 두려움에 휩싸인 그에게 지금 마라토너의 안정적인 숨쉬기는 ‘누군가는 이미 지나갔고 누군가는 좀 늦게 지나가게 될’ 길 위에서 단지 ‘완전한 소멸’로 이어지는 행위로 새롭게 인식된다.  


김은 어둠에 모습을 감춘 국도 속으로 마라토너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흔들리는 흰 점이 되어 차츰 작아져가다가 끝내 숨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완전한 소멸은 오히려 어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도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일깨웠다. 김은 홀린 듯 흰 점을 삼킨 어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한 소멸’이 그를 어둠 쪽으로 이끄는 순간 그의 등 뒤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김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이 모는 것과 같은 종류의 트럭이었다. 바람 소리나 바퀴 소리, 짐칸에 넣어둔 물건이 덜컹거리는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잘못 들었지 싶었으나 트럭이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다시 한번 선명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어둠에 모습을 감춘 운전자가 부는 모양이었다.


트럭은 자신에 대한 '김'의 환영이다. ‘김이 모는 것과 같은 종류의 트럭’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나 바퀴 소리, 짐칸에 넣어둔 물건이 덜컹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 않고 오직 운전자의 ‘휘파람 소리’만 들리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더구나 이 휘파람 소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숨을 끌어올린 후 천천히 내뱉는 식으로 이어가’는 숨을 떠올리게 한다.  


어른은 혼수상태에 빠진 이가 으레 그렇듯 인공 장치의 힘을 빌려 숨을 끌어올린 후 천천히 내뱉는 식으로 숨을 이어가고 있다 했다.


휘파람 소리만 내며 달리던 트럭은 김의 눈앞에서 마라토너가 사라진 어둠을 밝히는 불꽃으로 소멸된다.


김은 휘파람 소리만 내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을 공연한 호기심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곡선 도로를 무리하게 돌던 트럭이 김의 시선에 놀란 듯 갑자기 사선으로 기울어지더니 노면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트럭은 순식간에 가드레일에 부딪혀 옆으로 기울어졌고, 놀란 김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불길이 치솟더니 이내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운전자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이 이미 그를 삼킨 것인지 그 전에 용케 빠져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트럭을 삼킨 불꽃이 순식간에 밤의 국도를 밝혔다.


김이 사고 장면을 보면서 곧바로 전화한 곳은 119나 112가 아닌 여자였다. 이것 역시 현실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휘파람 소리만 들리는 트럭이 김의 환상이라면 마찬가지로 불꽃에 소멸되는 트럭 역시 환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안정적인 그 무엇을 표상하는 여자와 공간적으로는 물론 정신적 거리감마저 완전히 멀어져 버린 상황에서 마치 지진을 겪는 듯한 공포감에서 시작된 환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 달리 완전한 소멸이 자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온 환영이기도 하다. (물론 이 트럭이 현실이라고 해도 소설의 결말이 주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 이것은 단지 나의 주관적 상상일지도 모른다)


김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당황하거나 빨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수화기로 들려오는 여자의 숨소리에 맞춰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행동을 한다. 차분하면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김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에도 숨의 간격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결국 여자에게 구애를 했다.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 반면에 그래서 진심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 뭔가 익숙한 듯한 것의 반복이면서 그래서 안정적으로 들리는 그런 말로써.


그러나 김은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상념에 빠졌다. 지진을 겪은 이 도시가 아닌 다시 돌아갈 도시, 그가 살아왔던 도시, 자신이 만들어낸 동일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그가 지금까지 해왔고 그래서 앞으로 하게 될 일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럼에도 당시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


이 단편의 마지막 장면은 저녁의 구애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저녁의 구애. 이제 저녁은 단순히 시간을 뜻하기보다는 구애하는 행위의 주어로 등장한다. 완전한 소멸과 더불어 그 너머 무엇인가 이어지리라는 인식을 던져주는 저녁이 '김'에게 사랑을 고백 (구애, 求愛) 한다. 혹은 '김'을 얽매는 (구애, 拘礙) 행위자가 된다. 그래서 '김'은 자신에게 ‘멀고도 먼 훗날의 일이 될’거라고 생각했던 장면을 바로 지금, 눈앞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김은 땅에 박힌 듯 멈춰 서서 조등(弔燈)처럼 환히 빛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동일한 점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