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들불 Oct 27. 2024

단편소설 - 시선(5)

부잣집 첩의 딸로 태어난 숙자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숙자가 큰엄마로 불렀던 본처는 다정하고 온순했다. 그에 반해 숙자의 친모는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던 여자였다. 악착같은 어머니 덕분에 숙자는 지금의 선기를 만나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선기는 첩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장모가 죽고 나서야 알았다. 정수가 네 살 되던 해였다. 그러나 숙자의 과거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숙자에게 강력한 힘이 되었고, 선기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정수는 어릴 때부터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던 착한 아들이었다. 주변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따르며 자랐다.  중심에 아버지가 있었다. 어린 정수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기준이자 규범이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처럼 은행원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 세상에 균열이 찾아온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이었다. 정수는 특별활동으로 연극반에 들어갔다. 본인이 원해서는 아니었다. 내성적인 아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부모의 기대 때문이었다. 첫 연극은 오즈의 마법사였다. 양철 나무꾼이 된 정수는 평소와 달랐다. 목소리는 열정이 넘쳤고 행동은 자유로웠다. 가면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첫 연극 이후에도 정수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했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온 정수는 다시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소년은 점차 문학에 빠져들었다. 딱딱한 수학이나 공식보다 세상 이야기가 좋았다. 정수는 작가나 연출가가 되고 싶었고 예술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취업률을 기준으로 한 대학 서열에서 예술 학교는 맨 마지막을 다투고 있었다. 부모는 완강히 반대했다. 취업은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였고 예술은 여유 있을 때 언제라도 할 수 있는 막연하고 모호한 일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명문대에 보내야 하는 담임도 부모의 뜻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수는 어른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수는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 정수에게 세상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재단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느리지만 꾸준히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수는 부모의 뜻에 따라 A 은행에 지원했다. 좋지 않은 학점 때문에 합격은 힘들어 보였다.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정수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반신반의하며 면접을 볼 때조차 합격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던 A 은행에 합격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A 은행 임원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넌 자격이 충분했다. 난 단지 보험을 준비했을 뿐이야.”


아버지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정수는 입사 후 책임감 있고 성실한 모범 직원으로 회사에 적응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고마운 마음도 없었다. 어릴 때 봤던 어떤 책이 생각났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 그 대가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이전 04화 단편소설 - 시선(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