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아직은 따가운 9월 초, 무명 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사람이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원 씨는 추석 때 어디 안 가세요?”
“... 그냥 여기 있어요.”
“아, 부모님이 멀리 계세요?”
순간 해원의 숨이 짧게 멎었다. 동료와 잡담을 하다가도 가족 얘기가 나오면 해원은 긴장했다. 정수와 만나는 시간이 잦아지면서 해원은 그가 물어보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했다. 도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진실을 말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진실과 거짓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말을 찾았다. 그래,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돼. 그렇게 마음을 정했지만 정작 정수가 물어보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저 혼자예요.”
해원의 답변을 들었을 때 남자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버림받았다는 뉘앙스를 알아채고는 얼른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또 다른 부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지 아니면 그들과 헤어진 건지, 돌아가셨다면 언제 돌아가셨는지, 사고인지 지병인지 등등. 해원이 어릴 때 혼자가 됐다고 말하면 그들은 성급하게 그녀를 고아로 분류했다. 하지만 해원은 단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된 시기를 말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 혼자가 됐는지 말하고 나면 침묵은 쇳덩이가 되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든 고아로 분류하든 혹은 무거운 침묵으로 이어지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녀를 떠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간절한 소망에서 희망을 빼고 나면 무엇이 될까. 해원은 스스로 묻고 답했다. 희망이 증발해서 말라버린 소망은 갑옷이 된다고.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조각의 마음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해원은 갑옷을 입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은 전 해원 씨를 알고 싶어요. 해원 씨 가족이 아니라."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그녀가 왜 혼자가 됐는지 궁금해했다. 정수는 혼자가 된 해원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한 것이다. 가족이 없는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날 짙은 녹색 그늘 아래가 아니었다면, 혹은 그 순간 눈부신 윤슬이 눈을 따갑게 하지만 않았다면 해원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수도 해원에게 깊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