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시는 택지개발로 아파트 시장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갭투자로 집값의 10~20%만 있으면 집주인이 될 수 있었고, 한 채만 잘 사고팔아도 일반 직장인의 연봉을 단숨에 벌 수 있었다. 여러 채로 벼락부자가 됐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퍼지면서, 자신만 소외되고 있다는 공포가 들불처럼 번졌다.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사야 한다. 몇 년치 연봉을 단숨에 벌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대출 이자는 푼돈이다. 전국에서 몰려든 중개업자와 분양업자들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더욱 부추겼다. 뒤늦게 아파트 시장에 규제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상가와 오피스텔로 눈을 돌렸다. 상가 분양가는 치솟았지만 분양가의 10%만 있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었다. 나머지 90%는 대출로 충당할 수 있었다. 분양업자들은 월세로 대출 이자를 내고도 이익이 남는다고 장담했다. 서너 개만 분양받아도 월세만 받아 생활할 수 있다. 알면서도 하나만 하는 사람은 바보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무개는 벌써 다섯 개를 분양받았다더라.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상가와 오피스텔의 완판을 알리는 애드벌룬이 곳곳에 떠 올랐다.
하지만 입주가 시작되면서 환상은 산산조각 났다. 약속했던 지하철은 착공조차 되지 않았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주민들은 빨강버스를 타기 위해 매일 전쟁을 치렀다. 출퇴근용 자가용은 필수가 됐다. 신도시 맘들은 낮 시간에 문화센터나 마트라도 가려면 차 한 대가 더 필요했다. 아파트 주차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법정 주차 대수는 30여 년째 그대로였다. 지하 주차장을 줄여 건설비를 낮추려는 건설업자와 그들을 대변하는 이익 집단 탓이다. 출퇴근 교통 지옥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퇴근 후에는 끔찍한 주차 전쟁을 벌여야 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교통 인프라 확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지하철은 물론 도로조차 지연되기 일쑤였다. 40대 가장들은 환갑이나 돼야 지하철을 타보겠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했다. 문화 시설과 주요 공원 등 생활 기반 시설은 계획만 발표할 뿐이었다. 교통 문제에 가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일하게 일정을 맞추는 것은 아파트와 상가, 오피스텔뿐이었다. 아파트 물량이 넘쳐나면서 전세금은 급락했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놓은 급매가 도미노처럼 번지며 집값은 폭락했다. 저렴한 전세의 신축 아파트를 찾는 세입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그럼에도 자영업자들은 높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상가는 하나둘씩 비어갔고 월세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대출 이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떨어졌지만 상인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임대료였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높은 분양가에 과도한 대출을 묶어 설계한 업자들과 이를 묵인한 권력집단이 함께 공모한 예견된 결과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빚에 허덕이면서도 도시는 번창하던 기이한 시기였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성된 공원 한편에, 복층 구조의 현대식 주민센터가 자리 잡았다. 공무원이 된 해원이 두 번째로 발령받은 곳이었다. 공원 내 식재된 나무들은 대부분 빈약해 나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몇 년이 지나도 한여름 햇빛을 막아주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휑뎅그렁한 공원 한 귀퉁이에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잡목이 몇 그루 모여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온 씨앗 몇 개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름을 알 수 없어 해원은 그냥 무명 나무로 불렀다. 그런데 무명이라는 이름도 나쁘지 않았다. 혹시 저 나무 이름이 정말 무명이 아닐까. 무명 나무들은 공원에 식재된 묘목에 비해 훨씬 크고 잎도 풍성했다.
잘 정돈된 공원 안쪽에 비하면 무명 나무 근처는 어수선했다. 주민센터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직원들도 잘 찾지 않아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가릴 것 없이 탁 트인 그곳은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악산이었다. 산 이름을 듣고 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비슷한 높이로 솟아오른 봉우리 두 개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나란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청계천도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오후 햇살이 내리비칠 때면 윤슬로 가득 차 눈이 부셨다. 해원은 번잡한 생각이 윤슬에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차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