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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Oct 27. 2024

단편소설 - 시선(3)

공원 화단 한쪽을 가득 채운 푸른색 수국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다. 그늘막 하나 없었지만 한낮의 햇볕 아래 모두들 밝은 표정이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해원은 무명 나무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있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청계천을 내려다보는 구부정한 어깨와 덥수룩한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뒤돌아보는 바람에 해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날도 지금처럼 서로 눈이 마주쳤다.


주민센터 1층은 현관 홀을 사이에 두고 민원실과 은행이 마주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해원은 유리문 너머 은행의 한 창구가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덥수룩한 머리 모양 때문이었다. 정확한 가르마를 한 깔끔한 은행원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지저분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은 아니었다. 전시회에 초대된 화가나 음악가를 연상시켰다.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와 짙은 눈썹은 고집 있어 보였다. 낮고 넓은 콧대가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를 풍기는데, 둥그스름하고 좁은 턱 때문인지 전체적으로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가끔 피곤해 보였지만 멍하게 앉아 있거나 등받이에 기대며 쉬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를 흘깃 볼 때마다 해원은 두루두루 친절한 사람이 생각났고, 때로는 자기 일에 몰두하는 책임감 있는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다. 가끔은 불쾌한 갈등을 피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보였다. 


그날은 오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쁘더니 한 순간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민원실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책상 앞에서 해원은 멍한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킨 채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버릇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오늘 백일몽의 시작은 오전에 왔던 한 민원인이었다. 그는 중후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남자였다. 검은 머리 사이사이 적지 않은 백발이 햇빛에 반짝이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이 빛난다. 민원인으로 왔던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 해원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했던 말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갑자기 그는 해원의 후원자가 되어 저택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의 아내가 해원을 반갑게 맞아준다. 다채로운 요리가 가득한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하며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간다. 대화 도중 그들은 해원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겨줄 거라고 말한다. 해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닥친 행운에 해원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바로 그때였다. 따가운 시선이 해원을 꿈에서 깨웠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해원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해원은 멍하게 고정시킨 자신의 시선이 정확하게 더벅머리 사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시선을 거두기엔 늦었다. 지금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상대의 시선을 붙잡고 우물쭈물하는 순간 남자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거의 동시에 그녀도 시선을 내렸다. 이마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삽시간에 목덜미 쪽으로 퍼졌다. 마치 속마음을 모조리 들킨 듯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칠 때마다 조용히 고개인사를 주고받았다. 표정에 신경 쓰느라 긴장한 해원과 달리 그는 잇몸이 드러날 만큼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눈을 크게 뜨곤 했다. 그 때문에 실룩거리는 눈썹은 개구진 아이의 장난기가 묻어났다. 지금 무명 나무 아래에 있는 남자는 바로 그 은행원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다들 여기까진 잘 안 오는데.”


시선이 처음 마주친 그때처럼 해원은 우물쭈물하다 엉겁결에 고개인사를 했다. 다른 곳으로 갈까 망설였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전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가 여느 때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실룩거리는 눈썹을 보자 해원은 순간 긴장이 풀렸다. 가실 필요 없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있을 어색한 상황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해원과 마주칠 때마다 꼭 알은체했다. 고개인사 대신 소리 높여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꾸하던 해원도 점차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무명 나무 아래에서 함께 있는 시간도 점차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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