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가 잘 될 줄 알았어요. 선임님은 신의 은총이 늘 함께 하시니까요.”
숙자에게 정수는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의 상징이었다. 신앙은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잣대였다. 교인들이 나누는 의견과 합의는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신앙 모임에 위계가 명확히 구분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역할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실질적인 봉사활동을 책임지는 주임이 있고, 주임들 중에서 오랜 경험과 신뢰를 얻은 선임이 있었다. 숙자는 선임 봉사자였다.
숙자는 신앙 모임에 적극적이었고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자주 교인들과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사적인 얘기들이 오고 갔다.
“그렇게 누워있는 꼴을 보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화가 나서 한마디 했더니 아침부터 나가서는 여태 소식이 없네요. 어디서 점심은 먹기나 했는지, 참 나.”
퇴직 후 집에서 세끼를 먹는 ‘삼식이’ 남편, 선기에 대한 하소연도 숙자는 마음 놓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개인사가 오가더라도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 빨리 드러나는 법이다. 어느 날 권 주임이 주변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숙자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공무원 며느리 들여서 좋겠어요. 의사나 변호사보다 공무원 며느리가 낫죠. 여자가 남자 머리 위에 있어서 좋을 것 하나 없잖아요, 호호호”
권 주임이 숙자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웬만한 혼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숙자였다. 주위에서는 요즘 세상에 은행 다니는 게 뭐 그리 큰 벼슬이냐며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숙자 앞에서는 그런 낌새조차 내비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다. 재벌집 딸 정도는 돼야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라며 다들 수군거렸다. 그런 숙자에게 말단 공무원이 성에 차지 않을 거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숙자는 경멸의 눈빛을 애써 미소로 감추며 권 주임에게 말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뭘 그런 걸 따져요. 당사자들이 좋으면 됐죠.”
숙자가 해원을 처음 봤을 때 놀랐던 건 그녀의 남다른 외모였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는 숙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심지어 그녀가 입은 심플한 정장은 디자이너의 작품처럼 세련되고 우아하게 보였다. 말단 공무원에 대한 실망은 그녀 집안에 대한 은근한 기대로 변했다. 그러나 상견례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듣자 숙자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