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불출하며 앓아누운 숙자와 달리 선기는 조용히 정수를 불러 말했다.
“왜 그 애여야 하는지 설명해 봐라.”
정수는 아버지 앞에서 그가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온갖 어려움에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목표로 했던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다. 결핍된 환경에서 자라나 오히려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하다고도 했다.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될수록 정수는 자신이 공허한 말을 내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하려 할수록 점점 더 모호해지기만 했다.
“아버지, 그냥 해원이라서 결혼하고 싶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 같아요.”
정수는 입사 후 줄곧 좋은 고과를 받았다. 은행일이 적성에 맞거나 승진에 대한 목표가 뚜렷해서 일에 몰두했던 것은 아니었다. 입사 내막을 알고 난 후부터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정수는 적어도 부서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일에 더욱 매진했다.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까지 일했다. 회사에서 인정받을수록 정수는 자신의 몸 한 부분이 조금씩 뜯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였지만 정신적 갈등은 대학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치 않았던 전공에 방황하던 그 시절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연극 동아리였다. 정수는 틈틈이 연출과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고, 비록 가작이긴 했지만 방송국 공모전에 입상하기도 했다. 정수는 입사 후에도 글을 쓰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렇게 3년이 흘러가면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명 나무 아래에서 퇴사를 고민하던 시간이 늘어가던 그 무렵, 그곳에서 해원을 만났다. 외모에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그녀의 과거가 순식간에 그를 뒤흔들었다. 정수에게 해원은 끝없이 펼쳐진 광야에서 스스로 선택한 길을 따라 힘차게 달려가는 인물이었다. 정수는 해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양철 나무꾼을 맡던 때부터 대학 동아리 시절까지 기회는 열려 있었다.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생각을 멈췄기에 길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수의 생각과 달리 해원에게는 애초에 선택 같은 것은 없었다. 공무원은 고아나 다름없는 수용자 자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자유로운 광야는, 빨리 벗어나야 할 고통스럽고 비정상적인 현실이었다. 해원이 안정적인 가정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집착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수는 순식간에 해원에게 빠져들었다. 연민에서 시작된 감정은 점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자랐다. 해원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정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감정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해원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결혼을 허락받아야 했다. 은행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선기는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기가 은근슬쩍 정수 편을 들자 숙자는 더욱 분통이 터졌다. 여태 말썽 한번 피우지 않았던 정수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 일도 잘 타이르면 될 줄 알았다. 결국은 부모 말을 따르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정수는 처음부터 완강했다. 아무래도 아들이 쉽게 뜻을 굽힐 것 같지 않았다. 숙자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