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폭설로 영동 고속도로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속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수가 엄지와 검지로 앞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이번에 휴직계 내볼까 생각 중이야.”
“휴직?”
4년 전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한 숙자는 해원에게 거창한 혼수나 예단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모두들 고아 며느리라고 알고 있으니 눈치 볼 일도 없었다. 그저 기본적인 것만, 최소한의 예의로 하라는 말만 거듭 강조했다. 문제는 그 ‘기본’이나 ‘최소’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참다못한 숙자는 해원에게 현금다발을 건넸다.
“그래도 명색이 예단인데 시장 바닥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정수는 해원이 상처받는 것이 마음 아팠다. 신혼집에서만큼은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 도움 없이 도시 외곽에 소형 아파트를 마련했다. 대출이 절반을 넘었다. 목돈이 많지 않았던 해원은 대출금만큼은 정수와 동등한 몫으로 갚았다. 드디어 대출금을 모두 갚던 날 해원은 한껏 들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정수가 처음으로 휴직 얘기를 꺼냈다. 아니, 시작은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얘기였다.
“해원아, 우리 대출금도 다 갚았고 이제 수빈이도 유치원에 가니까 시간 여유도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 다시 글 쓰고 싶어.”
유튜브로 레시피를 보던 해원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자기 원래 작가 되고 싶어 했잖아. 시간 날 때 소설이라도 써 봐. 요즘 웹소설로 돈 많이 번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이번에 육아휴직 내보면 어떨까 해.”
감자를 으깨던 해원의 손이 얼어붙은 듯 멈췄다. 정수는 어색해진 상황을 눈치채고는 멋쩍게 웃어넘겼다.
“생각해 보니까 연말 앞두고 다들 바쁜 데 혼자 도망치는 것 같기도 하네. 그냥 해 본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마.”
연말이 되어 정수는 차장으로 승진했다. 동기 중 가장 빠른 진급이었다. 관리자로서의 업무와 책임은 더 늘었다. 정수는 퇴근 후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도 작가 워크숍이나 독서 모임 같은 활동은 점차 늘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출판사 사람들과도 자주 만났다.
“요즘 은행일도 바쁘다며. 집에서도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잖아. 다른 건 몰라도 취미로 하는 모임 정도는 빠지고 좀 쉬는 게 어때?”
편두통으로 힘들어하는 정수를 보다 못해 해원이 한 마디 했다. 정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굳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버렸다. 해원은 그 말이 그렇게 화낼 일이었나 싶어 의아했다. 때늦은 폭설 속보 속에서 휴직 얘기를 듣는 순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서재에 있었던 건 은행일 때문이 아니었다. 정수는 농담처럼 휴직 얘기를 꺼냈을 때와는 달리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작가 일, 하고 싶어서?”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자 해원은 당황스러웠다. 정수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 그거 이제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