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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Oct 27. 2024

단편소설 - 시선(11)

숙자는 정수가 휴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들 내외를 시댁으로 불러들였다.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무급휴직이나 육아휴직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임에서도 누구의 남편 혹은 아들이 휴직했다는 소문이 하나둘씩 들렸다. 숙자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얼마 전 보란 듯이 승진한 정수였다. 아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점심 후 자연스럽게 모인 자리에서 휴직자 얘기가 돌았다. 


“아무래도 능력 없는 사람들 먼저 쉬게 하는 거겠죠? ”


권 주임이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숙자는 짐짓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능력 있는 사람을 왜 집에 보내겠어요? 게다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그래도 예전이랑은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요. 요즘 젊은 엄마들도 다들 직장 다니니까 남자도 육아휴직 많이 한데요.”


백 주임이 그들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헛웃음을 짓던 권 주임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 타이르듯 말했다.


“아이고, 백 주임, 회사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회사에 도움 되는 사람을 왜 쉬게 하겠어요? 능력 있어서 승진한 사람한테는 육아휴직도 안 내준데요.”


숙자는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자신의 생각을, 마치 어디선가 들은 양 말했다.


“육아휴직 핑계로 이참에 월급 축내는 사람들 먼저 내친다고 하더라고요. 말이 휴직이지 그대로 잘릴지도 모르고요.”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전직 은행 임원의 아내이자 잘 나가는 은행원 아들을 둔 숙자의 말이었다. 다들 진지하게 듣는 눈치였다. 갑자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숙자는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모임 사람들과 나누던 대화가 지금도 선명했다. 자기 아들, 정수는 결코 무능한 인간이 아니다. 정수를 그런 구설수에 오르게 할 수는 없다. 만약 정수가 휴직이라도 하는 날에는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정수야, 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승진까지 한 네가 뭐가 모자라서 집에서 애나 보겠다는 말이냐.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거야?”


“모자라다뇨, 어머니. 그런 거 아녜요. 수빈이가 저를 잘 따르잖아요. 어릴 때 아빠랑 함께 있는 시간도 많이 만들 수 있고 좋잖아요.”


“애를 챙기려면 애미가 집에 들어앉아야지. 너도 그렇고 우리도 좀 쉴 수 있고.”


출산 후 곧바로 복직한 해원은 육아휴직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리해서라도 대출금만은 정수와 동등한 몫으로 갚고 싶었다. 육아를 병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베이비시터를 구해 어떻게든 버텼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어린이집에 보내기도 했다. 딸에게 미안했지만 몇 년 만 참으면 모두 보상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숙자는 악착같이 직장에 나가려는 해원이 못마땅했다. 그런 숙자에게까지 해원은 가끔 딸을 맡기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숙자 편을 들고 싶었다. 정수가 생각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수가 원하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휴직이 당장 퇴직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닐 터였다. 


“어머님, 수빈이 아빠가 요즘 일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건강도 걱정되고요. 저는 다음에... ”


숙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해원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 너 말대로 요즘 얘 얼굴이 말이 아니다. 여자가 집에 있어야 남편 건강도 챙겨줄 거 아니냐?!”


정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어머니. 사실은 이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려고 그래요.”


말문이 막힌 숙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선기가 입을 열었다. 


“글 쓰는 일 말이냐? 그런 거야 말로 퇴근 후 집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당장 어디 출판사에 계약이라도 한 거냐? 마감이나 기일이 정해진 일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럼 우선 그 일이 밥벌이가 되는지 알아봐야지.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 정도는 이제 구분할 나이 아니냐. 넌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다.”


해원이 정수를 거들었다. 


“아버님, 수빈 아빠가 쉬는 동안 생활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얼마 전 대출금도 다 갚았고요. 이제 제가 버는 돈으로도....”


숙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해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깟 공무원이 벌면 얼마나 번다고 생색이냐! 작년에 승진해서 멀쩡히 잘 다니고 있는 남편을 주저앉히면 저절로 건강해진다니? 네가 집에서 챙겨 줄 생각을 해야지! 넌 어떻게 네 생각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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