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익숙했던 주변은 하나둘 느려진 시간에 맞춰 변했다. 수빈이가 어린이 집에 있는 동안 해원은 주로 근처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말이면 사람들로 붐비는 공원이지만 그 시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로툰다에서는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언덕 위에서 아래까지 계단형 화단이 이어졌다. 짙은 보랏빛 붓꽃과 다양한 파스텔 톤의 히아신스 그리고 저 멀리 샛노란 수선화가 눈에 띄었다. 드문드문 검붉은 꽃과 짙은 갈색 꽃들이 보였지만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수선화 화단의 끝은 수초로 뒤덮인 작은 인공늪으로 이어졌다. 모든 꽃은 누군가의 손에 잘 가꾸어져 있었고, 나무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원은 다르게 보였다. 한 순간 시들어버릴 꼿과 그늘을 만들지 못하는 빈약한 나무들이었다. 휴직 후 자주가게 된 공원이지만 오래 머물게 되지는 않았다.
“엄마, 우리 말 보러 가자, 말!”
유치원에서 돌아온 수빈이가 말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졸랐다. 영상으로 말을 본 모양이었다. 때마침 가까운 경마공원에서 야간 경마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경마장에 가 볼까?”
처음 가 본 경마장은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해원은 안내판 앞에 서서 경마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았다. 경기 시작 두세 시간 전부터 말과 기수에 대한 여러 검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예시장에서 경주에 참여하는 말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예시장, 미리 보는 곳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수빈아, 저기서 진짜 말을 볼 수 있데.”
예시장에서는 경주마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기수의 왜소한 체구와 대비되어서인지 말등이 생각보다 높았다. 윤기가 흐르는 탄탄한 근육은 강인하고 위압적이었다. 한가롭게 풀을 뜯는 온순한 동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딸아이도 말을 직접 보고는 놀란 모양이었다.
“엄마, 말이 원래 저렇게 커?”
“그러게, TV에서 보던 것과 다르네. 몸이 정말 딴딴해 보인다, 그치?”
예시장을 나온 해원은 마권을 구입해 보기로 했다. 자기가 선택한 말이 직접 뛰는 걸 보면 수빈이도 좋아할 것 같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안내를 살펴보았다. 우승마를 맞추는 단순한 게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권이 다양했다. 단승식, 연승식, 복승식, 쌍승식, 복연승식 등등. 해원은 단승식을 택했다. 일등을 맞추는 간단한 방식이었고 그래서 수빈이도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수빈아, 아까 말에 붙어 있던 번호 기억나지? 어떤 말이 일등 할 것 같아?”
해원이 디지털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번호와 말이름이 함께 표시된 스크린에는 수빈이가 읽기 힘든 이름도 보였다.
“숫자만 말해봐, 수빈아.”
유심히 살펴보던 수빈이 큰 소리로 말했다.
“3번, 번개돌이!”
관람대에서 바라본 경주로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해원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간에 압도당했다. 체육공원에 있는 육상 트랙처럼 한눈에 경기장이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결승선 근처에 위치한 관람석에서는 맞은편 출발 지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출발선에서 준비 중인 경주마들은 거대한 야외 스크린 안에 모두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신호와 함께 대형 스크린 안에서 게이트가 동시에 열렸다. 순간 십여 마리의 말들이 힘차게 발길질하며 뛰어나갔다. 눈가리개가 씌워진 경주마들은 성난 숨을 내뿜으며 앞만 보고 달렸다. 네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다. 예전 같으면 자유롭게 달린다고 느껴졌을 법했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어디론가 절박하게 도망치는 듯했다. 잠시 후 저 멀리 트랙 코너에서 붉게 피어오르는 모래 구름이 보였다. 곧바로 해원의 시선에 한 무리의 말이 들어왔다. 스크린 속에서 현실로 튀어나온 말은 모두 자그마하게 축소되어 있었다. 해원은 강인하고 위압적인 말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말들은 모두 절박하게 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