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매물도 섬에서 엄마는 깡시골 창녕에서 나고 자랐다. 넉넉하지 못했던 친가와 외가에서 피할 수 없는 가난을 물려받은 그들은 적게 배우고 빨리 일터로 나서야 했다. 흘러 흘러 엄마 아빠는 부산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삼 남매를 길러내기란 참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하나가 주인집 아주머니들이다. 우리는 항상 주인집 구석에 있는 셋방에 세 들어 살았고 주인아주머니들의 인심에 따라 눈치를 더 보기도 덜 보기도 했다. 한 칸짜리 방에서 복닥거리며 살던 시절엔 주인아주머니가 참 좋은 분이셨다. 그 집엔 나랑 동갑인 친구 미미가 있었다.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끔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미미를 부러워했을까? 워낙 어린 때라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짐작이 간다. 그들이 악착 같이 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장녀인 나는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일찍이 알아버렸다. 엄마가 시키는 일이라면 척척해냈다. 동생들 밥을 먹이고 집 청소를 하고 얌전히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일. 그 일과를 잘 해냈을 때 엄마 아빠가 기뻐하는 모습에 안심했다. 내 몫을 지키기보다 동생들에게 잘 양보했는데 철없는 동생들이 나를 무시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일기장에 보니 "동생들이 나를 무시해서 속상하다"라며 토로한 내용도 있었다.
자라고 난 뒤 이력서를 쓸 때 나를 소개하는 가장 첫 문구가 이랬다.
[저는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책임감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고...]
그랬다, 책임감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았다. 장녀라는 이름으로 나고 자라며 대견하다는 말을 밥 먹듯 들었다. 그 덕에 엇나가지 않고 성실히 살아왔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안쓰러움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감도 동생들을 돌보고 양보하던 참을성도 다 내 자산이 되었다.
내가 의지해야 했던 부모님이 내게 의지한 시절의 기억은 무겁고 애타는 기억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유는 그들의 최선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몫을 감당했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첫째라서, 첫째니까 감당해야만 하는 일은 없지만 종종 그때를 생각한다. 동생들과 밥을 먹고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저녁, 장녀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을 지켜내던 저녁.
그날의 나를 마주 본다. 토닥토닥.
"잘하고 있어 송아, 가끔 떼써도 돼. 친구들이랑 실컷 놀다 와도 되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