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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송 Aug 03. 2024

그리운 명월리

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렌터카를 찾는 것이었다. 업체를 통해 예약한 차를 받아 탔다. 미소가 운전석, 남동생 진이 조수석에, 나와 엄마 아빠는 뒷좌석에 앉았다. 여행 전 끝까지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렌터카를 빌리느냐 관광택시를 예약하느냐였다.


우리 집엔 평생 차가 없었다. 부모님은 집과 직장이 5분 거리인 자영업자였고 운전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차를 살 형편도 못되었으리라 짐작할 뿐 왜 우린 차가 없는지 물은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되고 자연스레 삼 남매 모두 면허를 땄지만 뚜벅이의 삶은 이어졌다.


그 즈음 미소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운전 연습이 한창이던 때라 제주에서 운전을 해보겠다 했을 때 아빠는 위험하다며 손사래를 쳤고 나는 박수를 쳤다. 만약 미소가 운전하는 차를 탄다면 우리 가족의 첫 주행이 될 것이었다. 첫 여행에서 첫 주행까지, 도파민 터지는 여행이 그려졌다.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렌터카를 빌렸고 모두 긴장한 채 차에 탑승했다. 3박 4일간 우리 목숨을 쥐고 있는 미소는 비장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시동을 걸고 주차된 차를 빼내 도로에 진입했다. 뒷좌석 창가에 앉은 아빠와 엄마는 창가 손잡이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우려와 달리 미소는 안정적인 주행을 이어갔다. 조수석의 진이 네비를 잘 봐주는 것도 한몫했다. 온 가족이 같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험은 생애 처음이었다. 함께 한적한 제주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마치 이대로 끝나도 좋을 영화의 엔딩 장면 같았다. 내내 잊지 못할 드라이브였다


3박 4일간 우리가 머문 곳은 제주 서쪽 명월리의 펜션이었다. 인적 드문 명월리의 풍경은 평안을 선물해 주기 딱이었고 숙소는 한 편의 동화 같았다. 거실엔 해먹이 놓여있었다.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모두 웃음이 헤퍼졌다.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 해먹에 서로 누워 사진을 찍고 한참을 깔깔 웃었다. 


제주의 밤, 숙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흑돼지를 구워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창밖 보름달이 환하게 거릴 비췄다. 비슷하게 생긴 다섯이 빌었을 비슷한 소원을 짐작해 본다. 


‘달님,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튿날, 협재해수욕장을 찾았다. 함께 바다 수영을 한 것도 처음이었다. 통영 매물도 섬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자신의 별명이 물개랬다. 아빠의 허풍에 다들 웃었지만 그날 통영 물개의 수영 솜씨에 모두가 놀랬다. 우린 어떻게 하면 물에 뜰 수 있냐며 아빠 옆에 붙어 막간 수영 강습을 받았다. 아빠는 몹시 신나하며 요리조리 시범을 보였다. 그야말로 물만난 물개였다. 


생각해 보니 아빠에게 기대 무엇인가 배웠던 기억이 까마득했다. 나이가 들며 스스로 하는 일이 늘고 반대로 부모님에게 알려드려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날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우릴 가르치던 아빠를 보며 그동안 그가 가졌을 무력감에 대해 생각했다. 짠하고 미안하고 귀여운 그에게, 앞으로 배울 거리를 늘려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아빠, 이것 좀 도와줘” 아직 우리에게 아빠가 많이 필요함을 자주 상기시켜드려야겠다.


숙소에 돌아와 아빠가 담배를 태우러 간 사이, 준비한 현수막을 바삐 걸었다. 환갑을 맞은 아빠를 위해 준비한 깜짝 생일 이벤트였다. 현수막을 발견한 아빠는 머쓱해하며 허허 웃었다. 아빠 몸보다 두 배는 큰 현수막 앞에 아빠를 앉히고 케이크에 초를 켰다. 아빠의 60년 고단했던 세월에 작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날 밤, 술이 왜 그렇게 달았는지 늦은 밤까지 온갖 이야길 안주 삼아 떠들었다. 여행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아빠는 점점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간 여행이라 일정을 짤 때 '엄마 아빠가 좋아할까?'가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떼 뮤지엄은 미지수였다. 그래도 전시를 경험하지 못한 부모님이 가봤으면 하는 마음에 미술관으로 향했다. 걱정과 달리 두 분은 전시를 온몸으로 즐겼다. 눈앞에 펼쳐지는 미디어아트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족끼리 가는 여행에서 ‘아직 멀었냐, 겨우 이거보러 왔냐, 무슨맛으로 먹냐’ 이런 말을 금지어로 미리 알려야 한다는 게시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단연코 최고의 여행메이트였다. 여행 내내 불평 불만 하나 없이 유쾌하게 여행을 즐기는 가족들을 보며 미소는 자신이 그동안 가족들을 잘 몰랐던 것 같다며 회고했다. 


처음 먹어본 음식, 처음 가보는 장소, 처음 타보는 비행기. 모든 것이 처음투성이인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게 설렜다. 내게 온갖 처음을 주셨을 부모님에게 세상의 다른 처음을 선물할 수 있어 벅찼다. 수없이 찍어댄 사진 속에 엄마의 소녀 같은 사랑스러움이, 아빠의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우리 삼 남매의 정겨움이 그대로 박제되었다.


지금도 되감기 하듯 머릿속 장면들이 재생된다. 그리운 명월리와 통영 물개, 첫 주행의 떨림과 설렘, 밤마다 술잔을 부딪히며 나누던 이야기들, 가족들의 생생한 웃음소리에 더없이 말간 미소를 짓게 된다. 이 기억의 유효기간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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