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첫 임신에서 유산을 했다. 아기를 떠나보내고 3년간 임신이 되지 않자 속앓이를 많이 하다 어렵게 나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그 아기가 태어났더라면 나는 둘째가 됐을까? 아니, 그럼 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나? 하늘에서 아기천사들을 땅에 보낼 때 어떤 기준을 따르는 걸까. 온 우주의 기운을 얻어 보내진 생명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삶은 축복일까.
애석하게도 초년의 삶은 비극이었다. 엄마 아빠의 지긋지긋한 다툼이나 가난 때문에 오는 서러움은 외면은 강하게 내면은 더 약하게 나를 몰아갔다. 애어른이란 슬픈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끔찍한 어른아이로 컸다.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한다. 어른 인체 하던 아이는 사실 무서운 게 많았다. 주구장창 나오던 바퀴벌레도 무섭고, 엄마가 도망갈까 봐 무섭고, 아빠가 인상을 쓰는 것도 무서웠다. 그 마음을 꼭꼭 숨겨 두었다. 마음속 깊이 모인 공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불시에 터져 나왔다.
당장의 고통을 끝내고 싶던 마음은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불안하고 우울했던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삶이란 살아봐야 이렇게 힘들기만 한 걸, 내 삶의 가치를 부정하곤 했다. 그럼에도 사니까 살아져 버텼다.
잘 살진 못했지만 사는 동안 사람으로 났기에 누린 것들도 많았다. 기똥차게 맛있던 엄마의 김치찌개나 나를 기다리는 아빠의 뒷모습 같은 거. 떠올리면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는 그런 것들. 그렇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왜 하필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좋고 끔찍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누리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삶의 그래프를 그린다면 나는 이미 최저점을 찍고 상승 곡선을 타고 있다. 삶의 끝을 알 수 없고 어디까지 더 바닥을 찍을지, 더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야 애어른도 어른아이도 아닌 그냥 내가 됐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평행선을 달린다는 게 이토록 편안한 거였구나.
간사한 인간은 과거를 잊는다. 그래서 자꾸만 기록한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잊지 말라고. 무수한 확률로 지구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눈을 뜨고 감는 하루에 안도하며. 살아보니 아픈 날 만큼 좋은 날도 오더라.
숙제 같기도 하고 축제 같기도 한 삶 속에서 하루하루 내 몫을 다하고 있다. 이 여행의 끝에 온전히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