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시작_이상교, 아빠 자전거_박덕희
이상교
세모 얼굴 귀뚜라미는
돌 틈을 비집어 울고
하늘은 바람을 풀어
구름을 쓸기 시작한다.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은
마침내 어미 나무 발치에
수수럭수수럭
발을 묻을 것이다.
여름내 오가던 길을 바꾼
달님은
동향인 내 방 창을 기웃대시다
방바닥에 희디흰 발을
내려놓으실 것이다
자다가 깬 밤,
나는 달님 발등 위에
내 발을 살몃 대 볼 일이다.
≪찰방찰방 밤을 건너≫ 문학동네 2019
가을이 이마를 내밀었어요.
나무들은 초록을 지울 것이고
하늘은 더 푸르러지겠지요.
고추는 태양빛에 마르면서 더 매워져 갈 것이고
풀벌레들은 목청을 높여 짝을 찾을 테고요.
모과도 여름내 모은 노란빛을 수줍게 내놓겠지요.
가을이 오시면
마중을 해야 할 텐데
시인처럼 내려앉은 달빛에 발을 대보면 어떨까요?
박덕희
흰둥이 앞세우고
둑길 걸으면
저 멀리 왕버들 이파리에 묻은
저녁이 푸르스름해져 와요
차르르르 차르르르
아빠가 귀뚜라미를 몰고 와요
가만가만 가을을 몰고 와요
흰둥이가 뛰어가
컹컹 가을을 맞이해요
귀뚜라미들이
아빠를 무동 태우고
둑길을 달려와요
《호랑이는 풀을 안 좋아해》 브로콜리숲 2020
푸르스름한 저녁에
아이는 흰둥이랑 아빠를 마중 나가는군요.
아빠가 몰고 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더 커지면
아이는 아빠를 만날 테지요.
아마도 아이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아빠 허리를 꽉 잡았겠지요.
아빠 얼굴은 안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을 거예요.
흰둥이는 왕버들에 묻은 저녁을 털면서 달렸을 테고요.
귀뚜라미 소리는
마당 안까지 따라왔겠지요.
아이는 아빠랑 흰둥이랑 같이
마당에 가득한 가을 소리를 밤늦도록 들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