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시를 좋아하세요?

부부 교환일기 by 김쥬둥

by 다슈니와 호돌이

26년 2월 10일

화요일



혹독한 한파가 조금은 잦아드는 나날입니다. 겨울이 잠시나마 봄의 꿈을 꾸는 것일까요. 차갑게 꿈꾸는 사람들은 때때로 시를 쓰곤 합니다. 제가 시를 처음 읽은 게 언제였을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책을 뒤적거릴 나이가 됐을 때는 만화책, 또는 소설책을 집어 들었으니까요. 시집은 얇지만 어쩐지 무겁게 느껴져서 쉬이 집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이 대체로 시답잖은 농담이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기존의 권위를 조롱과 혐오로 해체하고 대항하는 현 세태에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풍자와 해학이라는 무기가 권력자들보다 약자에게, 때로는 그들 자신에게 향하고 있으니 슬플 따름입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시를 본다는 건 소위 ‘있어’ 보이는 행위였던 것 같습니다.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만으로 지식의 소양을 뽐낼 수도 있었겠지요. 하물며 시를 쓴다는 건 그 극치에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이의 오랜 꿈이 시인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사실 제가 학창 시절을 보낼 때부터도 시는 한물간 유행처럼 취급되곤 했습니다. 운율적 요소, 회화적, 형식적 요소가 뭐가 어쨌다는 건지. 수학능력시험을 목표로 달려가는 수험생들에게 있어 시는 그저 까다로운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은유법을 외우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외웁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여기서 A와 B의 관계와 같은 문장을 고르시오. 정답은 2번, 틀렸어, 4번이야. 역시 너는 나랑 맞지 않는다. 안녕. 다들 이렇게 시와 작별했겠지요.

저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과 특성상 본격적으로 시를 학업의 영역에 둬야 했던 탓에 강제로나마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기억 저편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님이 이런 말을 했었죠. “말이라는 것은 많이 쓰면 먼지가 묻거든요. 예를 들면 ‘사랑’ 같은 말은 너무 아름답고 좋은 말이잖아요. 좋은 말이다 보니 노래부터 시작해서 일상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죠. 그러다 보니 본질의 의미가 희석되고 막상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말을 써도 울림이 없습니다. 좋은 문학이란 그 먼지를 털어내서 말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정확한 대사는 아니고, 기억에 기대어 적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언어, 말은 우리의 생각을 규정한다고 하죠. 생각의 도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건 곧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형도 시인의 시 <엄마 걱정>의 전문을 가져와 봤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머리에 이고 나간 열무가 다 팔리지 않아 이파리가 시들 때까지 종일 시장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나도, 해도 시들고.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노라면 저 멀리서 시든 배춧잎처럼 지친 발소리가 들릴 듯 들리지 않겠죠. 차디찬 윗목의 기억은 때때로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다는 시구를 보면 저는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집에서 연탄을 때던 어린 시절. 어머니께선 밥을 짓자마자 부드럽고 찰진 부분을 따로 담으셨어요. 뚜껑을 꼬옥 닫아서 주시면, 저는 그 뜨거운 밥공기를 받아 들고 종종거리며 뛰어갑니다. 장롱에 켜켜이 쌓인 솜이불 가운데에 깊숙이 밀어 넣어야 하거든요. 그러고 나서야 어머니와 누나, 제가 저녁을 먹습니다. 미처 끼니를 때우지 못한 아버지께서 밤늦게 오시면 누나와 제가 앞다투어 장롱의 밥공기를 내어드립니다. 그때의 그 온기가 아버지의 고된 하루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을까요. 이젠 여쭈어볼 수 없기에 분명 그랬으리라 믿을 뿐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뜨거운 밥공기가 잠시 몸을 뉘었던 자리의 온기를 더듬듯이 매만져봅니다.


봄날의 온기를 닮은 다슈니가 생각나는 시, 이원하 시인의 시도 발췌해서 남겨봅니다.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후략)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매일 다슈니를 감시하는 김쥬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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