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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Sep 22. 2016

#04. 소소한 수영장 이야기: 코피

  아무리 오랜만에 하는 격한 운동이었다지만, 아침 6시에 일어날 일이 없는 백수라지만, 평소에 비실거리고 잔병치레가 많은 약골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다.      


  전날에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일에 치어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것도 아니고, 심지어 걱정되는 마음에 일 년에 한두 번도 하지 않을 오후 10시 취침을 시도했다. 아침부터 운동하려면 최소 8시간 숙면을 취해줘야 하니까.     

너무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기대감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진 탓이었을까. 수영강습 첫날, 강습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내 코에서는 장렬하게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렇다, 첫날부터 수영 도중에 코피가 터졌다. 아, 부끄러움은 나의 몫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 얘기를 들은 지인은 내게 말했다.


다시 수영장 나갈 수 있겠어...??      



  나는 건강한데 허약 체질이다. 살면서 크게 아팠던 적이 없고, 쫄보인 성격 탓에 과감한 시도를 해본 적도 없어서 육신을 잘 보존해왔다. 그런데 반대로 자잘한 병에는 자주 걸린다. 이빨은 온통 금니로 가득하고, 입술 주위에는 수포가 자주 나며, 환절기에는 무조건 감기를 달고 산다. 심지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도 종종 감기에 걸린다. 비염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소화가 안 되는 경우도 있으며, 어떨 때는 장이 활동을 멈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크게 아플 일을 잘게 쪼개서 겪는 것 같단 망상이 들 정도로 내 몸은 잔병 공화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한 건 두 가지이다.


눈병과 코피. 양. 대. 산. 맥.


  대학원생이라 책과 컴퓨터를 보는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눈병은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자주 다니는 안과의 의사 선생님은 개인 주치의인 것 마냥 친근하기만 했고, 집에는 다 사용하지도 못한 안약이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다. 가끔은 비록 안약이지만 다른 흉터에 바를까 고민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너무 많아서, 아까워라.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침에 병원에 다녀왔다. 급성 염증이었다.     


  나를 가장 많이 찾아오는 건 단연 코피다. 세수를 하고 있으면 주르륵, 샤워를 하다가도 주르륵, 코를 풀다가도 주르륵. 슬픈 건 아무도 안 보고 있는 때에만 코피가 난다는 것이다. 열심히 뭔가를 하는 중에 그러면 "헤헷~ 나 백수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이라고 티라도 낼 수 있을 텐데. 엄마 앞에서 터지면 저녁 반찬이라도 달라질 텐데.     

  

이상한 건, 잠을 잘 잤다고 생각했는데 코피가 나는 날이다. 바로 수영 첫날처럼. 이건 예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특별히 힘들게 운동한 것도 아니었다. 첫날이라고 한 일은 ‘음파 음파’ 물에 머리 넣고 호흡하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발장구 치기 정도였으니까. 어찌나 열심히 ‘음파 음파’를 했는지, “다음 과정 알려드릴게요.”라고 말하던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며 황급히 외쳤다.


선생님, 코피 나요!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향한 내 등 뒤에서 이어 들리는 치명적인 한마디. “얼마나 열심히 하셨길래 벌써 코피가 나요, 크크크크크.” 주변에 사람이 네 명밖에 없어서 다행이야.    


  화장실에서 코피가 멎고 나서 한참을 고민했다.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집으로? 오늘이 지나면 부끄러움은 사라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유유히 헤엄쳐버릴까? 쿨하게? 결국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수영장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군. 오히려 고민한 게 민망할 정도로.    




  그 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코피가 난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유유히 수영을 했다면 상황은 어땠을까. 내 주변은 선홍빛으로 물들고, 소독약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이고, 다른 회원들은 그 광경에 기겁을 했을까. 아무도 수영장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 비록 겨우 코피 정도로 수영장을 붉게 물들이진 못했겠지만, 대단한 민폐였겠고, 나는 정말로 다시 수영장에 가지 못했겠지.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사소하지만 특별한, 민폐지만 재밌는, 백수의 반복되는 일상을 잠시나마 흔들만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지나간 기대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는 하나의 습관을 얻었다. 수영 동작이 끝나면 매번 코를 한번 훔쳐보고 내 손이 선홍빛으로 물드는지 확인하는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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