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리가타케와 첫 만남...
목적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의 감정과 느낌을 희열을 맛본 사람들 대부분, 그 목적한 곳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서의 어려움 따윈 쉬이 잊어버린다. 그래서일까? 나 또한 무언가를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마지막에 올 희열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한발 한 발을 내딛고 있을 뿐이다...
야리가타케로 향하는 대협곡 사이 양옆으로 펼쳐지는 북알프스의 고봉 파노라마 뷰를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 그러는 사이 고도는 슬며시 트레커도 모르게 올라간다. 깨끗하고 화창한 날씨 덕에 한낮의 태양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9월의 산중이라 짧은 여벌 옷은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했던 건 오판이었다. 고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낮의 열기를 피할 곳은 더욱이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오마가리 분기점...
이정표를 바라보고 있는 뒤쪽으로는 경사도가 상당해서 갈 엄두는 나질 않아 한번 흘깃 보고는 이내 야리가타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한낮의 열기가 배낭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부터 발걸음도 이미 천근만근이었고, 이따금 지나쳐 내려오는 분들이 있지만 혼자서 걷는 이 길에 대한 외로움도 느껴졌다.
분기점을 지나 다시 코너를 돌면 아래와 같은 풍광이 지친 나를 달래준다.
아... 이 맛에 북알프스로 발걸음을 하는 것인가? 조금 전 나의 시름을 한 번에 달래 주는 듯 저 멀리 북알프스의 연봉들이 손짓하는 듯했다.
걸어도 걸어도 야리가타케의 모습은 나타나질 않는다. 오히려 꼭 녀석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오기마저 불타 오른다. 저 멀리 계곡 옆으로 드러나있는 등산로가 한없이 멀어 보인다. 저 길을 걸어 올라 멀리 보이는 계곡의 코너를 돌면 야리가타케가 모습을 보여 줄 것만 같은 느낌은 계속되었다.
정신없이 걷고 또 걸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호흡은 무너진 지 오래...
텐구바라 분기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의 오늘 목표점은 야리가타케가 아니라 셋쇼휫테 산장까지만 가기로 했다. 고도 2,200 ~ 2,300미터쯤 되었을 때부터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야리사와 롯지부터 시작된 오르막은 야리가타케까지 계속될 것이라 보이고, 이곳 텐구바라 분기점이 중간 지점일 듯했다. 일본은 산에서의 흡연이 자유롭다는 것이 혼자 걷는 이에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자유롭다는 것에 비해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이 나라의 국민성 또한 부러울 따름이다.
올라오는 동안 점처럼 보이던 저 멀리의 내려오는 두 분이 지나쳐 간다. 인사하며 스치는 순간 얼마나 저들을 따라 내려가고 싶었는지... 마음속은 요동쳤다. 그러나 그분들 뒤에 펼쳐진 저 모습은 또 무엇인가?
다시 나를 달래주는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냥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북알프스의 모습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가파르게 경사도 높은 바위길을 하염없이 올라가던 중 구름 낀 하늘이 살짝 열리는 사이로 뾰족하게 생긴 봉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그제야 야리가타케라는 것을 직감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까지의 모든 난관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얄밉게도 살짝 얼굴만 보여주곤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걸음 한걸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중 바위에 쓰여있는 1,500의 숫자...
야리가타케까지 이제 1,500미터의 거리를 남겨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의 경사도의 강도는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고개를 한참이나 올려 쳐다봐야 할 정도였다. 저 1,500의 숫자를 본 순간에 다시 털퍼덕 주저앉아버렸던 기억이 난다.
더 이상 올라갈 힘이 나질 않았다. 저 멀리 셋쇼휫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그곳마저도 갈 수 없을 만큼 멀게만 느껴졌다.
철퍼덕 주저앉아 바라보면 한없이 좋은 모습을 하고 있건만...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왜? 이리 더디고 힘든지 모르겠다.
1,500이라고 쓰여 있는 바위 옆으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물 병을 들고 나오는 모습에 나도 물병을 챙겨 그곳으로 향한다. 계곡 물이 그대로 끌어져 오는 것을 알지만, 저 물을 마시고도 물갈이도 없이 그저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기엔 딱인 물맛이었다. 척박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돌밭뿐인데 이렇게 흔하게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고, 고마울 뿐이었다.
다시금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보이지 않는 야리가타케 방향을 올려다본다.
구름 밑 셋쇼휫테의 뾰족한 지붕이 보인다. 저곳까지만 가자...
더 이상 가자고 하지 않을 테니... 저곳까지만 가자고 나를 달래 본다.
1,400...
이곳까지 오는데 1시간은 족히 걸린듯했다. 100미터의 거리가 이렇게 멀고 오래 걸리게 되는 것인지 이날 알았다. 단숨에 내딛어도 도착했어야 하는 거리를 말이다.
저 아래 점처럼 보이던 이들은 야리사와 롯지에서 마주쳤던 직원들이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올라오면서 작은 것 하나까지 주워 담으며 올라온 모양이다. 한 손엔 쓰레기봉투가 들려있었고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걸어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1,300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셋쇼휫테 산장으로 가는 분기점...
그분들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모양이다. 가방에서 그들 특유의 삼각김밥을 꺼내어 먹는다.
나도 이곳에서 행동식을 꺼내었다. 고도 때문인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봉지를 보며 잠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땀을 식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