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누려~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봤다. 날이 썩 좋지 않다. 비도 추적추적 오고 부스스한 상태로 복층계단을 내려간다. 아직 유라와 서아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당으로 향하는 대형 창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순간 드는 생각 '오늘은 나가지 말까?, 비도 오고 나가기 귀찮다.'였다. 거실에서 사부작 거리는 소리에 유라가 나온다. 유라도 밖을 보고 비 오네...? 한다. 일기 예보 어플을 켜보니 비가 많이 오는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귀차니즘이 샘솟아 올라오고 있던 나는 유라에게 말했다. "오늘은 집에서 쉴까?" 혹시 나가고 싶어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유라도 덥석 내 말을 문다. "그래 비도 오는데 나가지 말자 좀 쉬자" 하는 거다. 제주에 와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나의 한마디는 우리의 한 달 살이 루틴에 큰 전환점을 주었다. 사실 한달살이를 온 것이기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육지에 있을 때는 평일에는 집에 있고 주말에 만 나들이를 가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생활한 거다. 제주에서는 관광객이 오는 주말에는 쉬고 평일에는 나가 놀아야 해! 하는 마음으로 제주도에 사니까 북적이는 관광지를 평일에 누려보자 했던 거다. 그런데 거의 매일 나가다 보니 나도 슬슬 지쳐가고 있던 거다. 그러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우리와 마주친 사장님 와 인사를 나누게 됐다.
"오늘은 안 나가셨네요?"
"네, 집에서 쉬려고요"
"엄마 들끼리 아이만 데리고 온건 처음이에요. 우정이 참 좋아 보여요"
"아 그런가요?"
"네 그리고 이렇게 매일 나가시는 분들도 처음이에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제주에서 한 달을 살아보려고 왔는데 너무 관광을 하러 다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거다. 그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변이며 맛집, 미술관 할 것 없이 아이들과 많은 곳 누볐던 거다. 그래서 오늘 쉬기로 한 거다 몸이 주는 피로감에 내가 반응을 한 거다. 그런데 '집에만 있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엄마, 놀자", "엄마 마당에 잠자리 잡으러 가자", "엄마 배고파" 등등 엄마 소리가 내 귀를 감쌌다. 아... 나갈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후회는 곧 낮잠타임으로 희석됐다. 매일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잤던 낮잠타임에 집에 있으니 침대에서 편안하게 낮잠을 자야 했던 거다. 겁이 많은 효린이는 거실에서 혼자 놀다가 엄마와 유라이모가 동생들을 데리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낮잠을 재우고 있으니 무서워서 내 옆으로 왔다. 토닥토닥 동생을 재우고 놀아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셋은 금세 눈을 감고 아주 푹~ 잠을 잤다. 세상에 이런 꿀잠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 진짜 피곤했구나 매일 운전하고 매일 아이 둘을 데리고 나가고 데리고 와서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이걸 8일이나 반복했다. 나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도 분명 힘들었겠다 싶은 거다. 특히 효린이는 동생들의 카시트 사이에 휴대용 카시트를 설치해서 뒷좌석에 끼이듯이 다녔다. 힘든 내색 하나도 안 하고 엄마를 잘 따라와 준 녀석이 너무 대견했다. 자고 있는 두 녀석을 보고 있으니 너무 사랑스러웠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엄마에 빙의해서 드라마에서 보듯 이마에 뽀뽀를 했다. 순간 으으응~ 하며 움직이는 거다. 그리고는 눈을 뜬다. 하... 뽀뽀하지 말걸 낮잠타임으로 희석됐던 후회가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 배시시 웃으면서 일어나는 거다. 두 녀석도 너무 잘 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제주라는 두 글자에 취해 너무 달리기만 했다. 오늘의 쉼은 30일이라는 장기전에서 브레이크를 아주 적절하게 밟은 거였다. 찐하게 집에서 쉬는 하루를 보내니 '아, 이게 한 달 살이지' 싶었다. 나갈 준비를 안 해도 되고 잠옷 차림으로 놀다가 함께 낮잠도 자며 충천하는 시간.
저녁은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고기도 구워 먹으며 아주 푸짐하게 한 상 차려먹었다. 휴식, 맛있는 음식에 우리의 체력은 정말 충전됐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하루였다.
여행이든 살이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일터. 군인이라는 디폴트 값이 또래 여성, 엄마들 보다는 체력이 좋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런데 그 세뇌가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유라와 아이들의 체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달린 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체력을 과신한 건 아닌지 돌아본 하루였다. 군대도 일주일 이상의 훈련을 하면 전투휴무라는 휴무시간을 준다. 아이들에게도, 유라와 나에게도 제주살이는 강행군 같은 훈련이었다. 오늘의 집콕은 바로 전투휴무였다. 전투력을 회복하는 시간이었고, 한 달 살이를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값진 쉼이었다. 군인이라 해도, 제주 아빠라 해도 체력을 과신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 제주 한 달 살이 애초에 쉬러 왔다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