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규선 Sep 14. 2021

함께 사는 인생


"어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최○○입니다.

오른손 들어보세요?  

이것은 무엇이에요?"


40분 남짓 형식적인 질문을 마친 후에, 건강보험공단에서 나온 심사원은 나에게 "모친은 뇌경색 진단을 받은 지 20여 일 밖에 안되어 이번 등급 심사에 탈락할 수 있다"는 얘기를 두 번씩이나 했다.


이에 나는 모친이 시신경 마비로 앞이 잘 안 보이고, 단기 기억 상실증을 갖고 있으며, 예전부터 관절염을 앓았고, 160cm 키에 80kg 고도비만자라 잘 걷지 못한다고 부연하며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녀는 노력해보겠다는 인사말만 남긴 후에 떠났다.


지난 6월 24일 을지로 B병원에서 뇌경색 진단을 받은 모친을 더 이상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수발하는 간병인을 두고, 그 외 시간에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그런데 비싼 간병비는 차치하더라도, 연로하고 거동까지 불편한 모친에게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또 남이 본인의 물건을 터치하는 것을 싫어하는 모친의 성격도 고려하여, 장남인 나는 아내와 상의한 후에 동생들을 설득해 우리 집에 모시기로 했다.


모친이 30년 가까이 살았고, 부친이 6년 전에 돌아가신 후에도 혼자 계셨지만, 모친의 빠른 회복을 위해 집이 넓고 손주들도 있어 답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간단히 옷과 필수품을 챙기고 마포 집을 떠날 때 아쉬워하셨지만, 완쾌된 후에 다시 돌아온다고 얘기하니 미소를 보였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1년에 몇 번 잠실에 오셨던 모친은 집 구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처음 와보는 것 같다고 하셨고,

또 방금 인사드렸는데 아이들이 외출했냐고 물었다.


또 시신경 마비에 따른 황반변성이라 눈이 침침하고 가운데만 보여 저녁식사 때 바로 옆에 앉아있는 손녀가 안 보인다고 하셨다.


내가 그동안 서재로 쓰던 방을 깨끗이 청소하여 모친 방으로 꾸몄다.


방광염도 앓고 있어 모친은 수시로 화장실에 갔는데, 바로 옆 안방은 문을 열고 들어가 또 그 안쪽 화장실까지 가기가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조명등을 켠 복도를 따라 멀리 현관 양쪽의 아이들 방을 화장실로 착각해 들어가기 일쑤였고, 낮에도 양손을 저으며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셨다.


열대야 때문에 소파에서 자는 나는 인기척에 깨었고, 방향감각을 잃어 거실 한복판에서 서성대는 모친을 마치 교통순경처럼 안내했다.


인지기능이 떨어져 수 차례 큰애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었고, 또 식사할 때 아랫 틀니는 끼었는데 윗 틀니는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이곳저곳 뒤지다 모친 가방의 작은 주머니 안에서 찾았다.


무더워 땀으로 목욕하는 우리들과 달리, 관절염이 있어 무릎이 시리다고 하여 에어컨도 제대로 못 켰고, 간혹 가동하면 긴타월로 몸을 가리며 춥다고 하셨다.


잘 걷지도, 잘 보지도 못하고, 단기 기억력까지 떨어진 모친에게 제시간에 맞춰 약을 잘 드시고, 운동하며, 식사를 잘하면 빨리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얘기하니 반색하셨다.


엊그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앉아 한 시간 넘게 차를 마시며 옛 얘기를 나눴는데,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해  더 이상 환자가 아닌 것 같아 밝은 빛이 보였다.


나는 모친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여드렸고, 가능한 바깥바람도 쐴 겸해서 휠체어를 끌고 시장을 보러 슈퍼마켓을 갔으며, 어제 토요일은 2시간 넘게 한강공원을 산책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부터 멀리 캐나다 외삼촌, 시카고 큰 형님에게 전화하여 생기를 불어넣으니 모친은 "오래 살고 보니 세상 편해졌구나!" 하며 기분 좋은 소리도 하셨다.


일제강점기 몇 개월 야학에서 글을 깨우친 것이 전부였던 모친은 고모가 국민학교를 나와서 그런지 배운 사람이라 예의가 바르며 배려심이 깊다며 늘 칭찬하셨다.


시누이올케 사이지만, 두 살 아래 고모와 친구처럼 지내는 두 분이 어제도 30분 가까이 통화하며 잡담을 나누었는데, 모친이 고모에게 하신 말씀이 나에게 큰 웃음과 밝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고모!  말도 잘하고 똑똑한데, 어느 대학 나왔어?"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작가의 이전글 동구릉 산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