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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Sep 13. 2021

이별의 노래


올봄 우리 가족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팬텀 싱어 3 가 끝난 지 반년이 돼가는데도, 아내는 TV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쳐들며 수 차례 재방송을 본다.


리모컨을 빼앗긴 나도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니 서부영화 '석양의 무법자' 총잡이처럼 휴대폰이 권총 같아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유튜브에서 오랜만에 가곡 '이별의 노래'를 보았다.


이 노래를 들으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박목월이다.


학창 시절 박목월은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다른 시인들보다 박목월이 내게 더 친숙한 것은 박두진이 '기독교'를, 조지훈은 '민족'을 얘기했으나, 박목월은 "향토색 짙은 자연을 삶의 가치"로 삼아 청록파 본연의 색깔에 정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한 시"라고 평가된 '나그네'와 '윤사월'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또한 그가 작사한 한국가곡 '사월의 노래'와 '이별의 노래'를 허전할 때 즐겨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 특히 선율이 곱고 호소력이 있는 가곡 '이별의 노래'(김성태 작곡)에 대한 박목월의 에피소드를 듣고 더욱 친근해졌다.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후,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만나 그들의 궁색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지 않느냐며 돈 봉투와 겨울 옷을 내밀고 서울로 올라왔다.


박목월과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그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져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라고 한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런 기막힌 사연을 알고 부르는지 모르겠으나 이 노래는 성악가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아마도 누구나 한 번쯤 불러보았을 것이다.


내가 H대 신입생 시절 개나리가 활짝 핀 진사로 언덕길을 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교내 스피커에서 박목월 교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이분이 우리 학교에 계시나!"


한때 나의 우상이었던 그가 쓴 명시 '나그네'와 '윤사월'을 다정다감한 경상도 사투리로 낭독했을 때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북에는 김소월, 남에는 박목월"이 있다고 칭찬할 정도로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그는 다음 해인 1978년에 63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에게도 시를 가르쳤던 그를 생각하며, 방금 유튜브에서 '이별의 노래'를 부른 성악가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 부르고 싶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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