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족이나 고위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북촌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통칭하였다.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들과 하급관리들이 살아 특히 남산에 사는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양반을 남산골샌님이라고 불렀다.
올해 첫 모임으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명소를 찾으며 역사공부를 하고자 북촌지역을 선택했다.
아침 10시 안국역 3번 출구에는 지각대장인 K 박사를 제외하고 하나 둘 반가운 얼굴들이 모였다.
새해인사를 나눈 후에 나는 간단하게 오늘 코스를 얘기했고, 지난주 보다 포근한 날씨를 느끼며 한국 경제사에 큰 업적을 새긴 계동 현대빌딩을 시작으로 동네를 설명하며, 운치 있는 원서동(비원의 서쪽)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한두 번쯤 가봤던 고급 한정식집인 용수산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창덕궁과 연결된 빨래터와 백 홍범 가옥에 대해 공부한 후에 한샘 디자인 연구센터인 특이한 5층 구조의 한옥 지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목조 가옥에서 그림과 유품을 보았고, 한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건물구조에 대해 관리인의 설명을 들었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지나 욘사마로 대표하는 겨울연가 촬영지였던 중앙고 정문 앞으로 나오니, 수년 전에 TV 다큐멘터리 3일에 소개된 예쁜 카페와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좁은 골목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란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주민의 사진이 커다랗게 붙은 벽은 인상적이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청춘남녀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폼을 잡고 카메라 셔터를 연실 눌렀다.
통기타 가수 양희은이 다녔던 재동초등학교는 한때 도심공동화 현상과 출산율 저하로 폐교 위기에 몰렸으나 지금은 200명 학생들을 가르치며 꾸준히 125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감사원 언덕길을 바라보며 100미터 왼쪽 골목으로 접어드니, 1910년대 최고 크고 멋진 집이었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가옥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곳 넓은 정원을 바라보는 사랑채는 유리창이 많았고, 안채와 복도로 연결되는 구조와 지하 방공호는 특이했으며, 넓은 대청마루에서 수십 명의 하인을 호령하는 가회동 안방마님의 높은 위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시 큰길로 나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가수 비와 김태희가 결혼한 가회동 성당이 보였고, 국내 최초의 치과병원이었던 '이해 박는 집'을 지나, 왼편으로 접어드니 한국판 비버리힐스처럼 넓고 세련된 동네가 나왔다.
H그룹을 성토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벽을 감싸고 있어 H그룹 회장 자택이 인근에 있음을 짐작하였고, 몇 계단을 오르내리니 TV에 소개된 그 유명한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곳 초입에는 유명세에 시달려 ''정숙한 관광을 부탁드립니다!''라는 표어가 눈에 띄었고, 멀리 남산을 배경으로 예스러운 한옥골목은 어느 집이나 포토존이었으며, 한국인보다 압도적으로 외국인이 더 많은 관광 특별지역이었다.
높은 담장을 끼고돌아, 오랜만에 정독도서관에 들어서니 과거 명문 경기고 시절의 면학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이곳은 우리들 학창 시절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경기고가 있었는데, 40여 년 전에 강남으로 이전하여 지금은 시립도서관이 되었다.
친구 Y박사는 과거 경기고 건물과 넓은 정원을 바라보며 ''여기는 처음 와본다''며, 초급 사무관 시절 겪은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얘기했다.
그는 Y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남보다 일찍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정부의 핵심 경제부처인 경제기획원에 들어갔다.
그때 행시 동기들의 70%가 경기고, 서울고 출신이어서 고교평준화 첫 세대인 Y박사가 졸업한, 은평구 C고교를 그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고, 불편한 통과의례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곳 출신 S교회 1년 선배들의 성공담을 얘기를 하다가, 친구 J가 미술대상을 받은 얘기에다 78년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출연한 후 한때 CM송 가수까지 했던 그의 다재다능한 예능 실력을 치하하였다.
조선시대 유명화가인 정선이 정원 한가운데에서 바위가 많은 인왕산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그린, '인왕제색도' 기념탑을 쳐다보며 이곳이 예나 지금이나 명당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곳 서울교육박물관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유물과 사진자료를 전시해서 배우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달고나, 도시락 반찬, 교복과 책가방, 그리고 궁핍했던 그 시절을 미니어처로 보는 추억여행은 우리 발길을 한동안 멈추게 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는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학생이 되어 2층 식당 한구석에 몰려 앉아 쫄면과 떡볶이세트를 먹었고, 2% 부족한 허기를 채우려 인근 삼청동 호떡집에서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야채호떡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윤보선 대통령 생가를 지나 안동교회 앞에는 때마침 영화 촬영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덕성여고를 나온 친구 얘기를 하며 인사동으로 건너갔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서머셋 호텔을 지나,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서는 10여 명의 일본 사람들이 모여 TV 중계방송을 하고 있었고, 미국 대사관 앞 넓은 세종로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각종 단체 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큰소리로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시끄러운 농성장을 가로질러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빠져나왔고, 마지막 행선지인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S교회로 갔다.
그곳 1층 역사박물관에서는 초창기 힘들었던 선교활동 자료부터 작곡가 홍난파와 현제명, 한글학자 최현배 등 유명인사들의 흔적까지 볼 수 있었고, 전망 좋은 13층 커피숍에서 친구 W가 직접 원두를 갈아 만든 3종류 커피를 각각 음미하여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시간이 없어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대학시절에 자주 갔던 불란서 문화원 등 북촌 일대를 모두 갈 수 없었지만, 집에 도착해서 만보기를 보니 17000보를 걸었다.
오늘 동행한 친구들 대부분은 북촌 코스가 처음이었고, TV에서 보기 어려운 숨은 명소를 안내하며 그곳에 얽힌 사연을 얘기하는 나에게 고맙다며 엄지 척을 하였다.
~~~~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사업이 어려운데, 이왕 칭찬을 받은 김에 재능을 살려 은퇴 후에 여행 가이드를 해볼까!
그러면 운동삼아 걸으니 건강에 좋고, 역사 지식을 넓히며, 부족한 어학(영어, 일본어)을 되살리고, 또 용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3년 후가 좋을까? 아니면 5년 후가 더 좋을까?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