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규선 Sep 13. 2021

안산 야간산행


작년 이맘때 인왕산에 갔다가 오랜만에 고교동기인, 이비인후과 의사 H(서울대 의대, K고교시절 전교 1등)를 홍제동에서 만나 술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그는 주말마다 안산에 오른다고 하여, 나는 무려 40여 년 전 까까머리 시절 종종 올라갔던 그 안산이 떠올라 흐뭇했다.


중학생 때, 나는 서대문 굴레방다리 집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중앙여고를 지나, 127번 버스 종점인 북아현동 꼭대기 약수터 옆길을 거쳐, 안산 중턱에 있는 금화아파트 옆에 살던 친구 C의 집에 가곤 했다.


현재 지방대 법과대학원장인 C는 그 당시 13평짜리 금화아파트를 살 형편도 못되어 아파트 사이 허름한 판잣집에서 생활했다.


그때 그가 공부할 방이 없어, 연탄창고인 2평 남짓한 허름한 공간에 조만간 자기 방을 지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


또한 그 당시 영천에 사는 고종사촌누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가까이서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박완서 씨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빠져든 이유는 그분의 현저동 시절 얘기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의 사춘기 중학시절의 소중한 추억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의사 H를 만난 후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에서 ‘안산’을 검색하였고, 비록 세대 차이는 나지만 박완서 씨를 생각하니 그분과 나는 한때 안산 일대를 방황했던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동질감을 느꼈다.


그 후에 나는 까마득한 추억을 더듬으며, 1년 사이에 이번 야간산행까지 안산을 무려 10번이나 올랐다.


그런데 50년이 넘게 서울에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에게 안산에 가자고 하면, 경기도 안산으로 착각해 그 먼 곳에 언제 가냐고 하기 일수이고, 십중팔구는 서울에 안산이 있는지 몰랐다.


참고로 안산을 소개하면 높이 295.9m이고,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며, 안산의 첫 번째 자랑은 서울시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펼쳐진 시원스러운 전망. 서대문구 홍제동, 연희동, 현저동 등 18개 동에 걸쳐있어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발달되어 있어 봉수대가 있는 정상까지 20여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인왕산에 가린 북쪽을 제외하고는 한강 물줄기 등 서울의 전모가 다 보이고, 특히 야경이 환상적이어서 밤늦게까지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안산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무려 27개에 달하는 샘터. 풍수지리학상 음산인 덕분에 수맥이 풍부해 어지간히 가물어도 산자락 곳곳에서 차고 맑은 물이 펑펑 쏟아진다.


산길이 수월하고 짧은 데다 불교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와 봉원사 북동릉에 늘어선 관음바위, 외적의 침입을 알리던 봉수대 등 볼거리도 있어 가족산행에는 안성맞춤이다.


구리시와 중곡동에 인접해 있는 아차산을 몇 차례 올라가 자신 있던 나는 2010년 가을 친구 2명과 처음으로 야간산행을 했었다.


막상 칠흑같이 컴컴한 밤에 각자 플래시 하나 달랑 들고 올라갔다가 길을 20여 분간 헤맸고, 이러다가 300미터도 안 되는 낮은 산에서 3명이 추운 날씨에 동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워커힐호텔 뒤에 있는 태왕사신기 촬영장에서 올라간 아차산은 주변에 불빛이 거의 없어 잘못하면 산길을 헤매기 십상이나, 안산은 서울 한복판에 있어 그런 염려는 없다.


지난번 등산 때는 봉수대 정상에서 ‘두부 사려’ 하는 확성기 소리를 듣고는 아랫동네가 무척 가까이 있네 하며 아내에게 웃으며 얘기했는데, 더운 여름 한낮에 산에 오르는 것보다는 시원한 밤에 멋진 서울 야경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번에 몇몇 친구들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일몰 시각에 맞추기 위해 그리고 병원 진료를 마치고 홍제동에서 기다리는 H와 만남을 위해 밤 8시까지는 정상에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7시까지는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하였는데 한 친구가 늦게 와서 7시 반이 다되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진아 기념도서관을 지나, 숲 속 좁은 길에 들어서니 과거 친구 C를 따라 뻔질나게 올랐던 금화아파트 계단과 네모난 돌담장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 감회가 새로웠고, 잘 정비된 도로와 운동시설들을 보면서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산 봉수대가 쳐다 보이는 능선의 한적한 벤치에 앉아서, 우리는 가지고 온 김밥과 과일, 음료수를 마시고 시원한 산바람을 쐬니 시간 맞춰 빨리 올라가느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은 금방 식었고, 턱까지 차 올랐던 숨은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약수터를 지나 무악정 방향으로 가는 길보다는 직접 봉수대를 향해 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하기도 했지만, 기암괴석을 타고 오르며 인왕산과 서대문형무소 등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날이 점점 어둑어둑해지자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 양쪽에 활짝 핀 하얀 개망초는 플래시를 비출 때마다 마치 키 작은 가로등이 되어 우리가 가는 길을 밝혔다.


드디어 정상!


독립문 역에서 정상까지 30분 만에 단숨에 오른, 아니 40여 년 만에 야간에 오른 안산 정상이다!


뿌연 안개로 서울시내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서울 토박이인 나는 정상에서 360도를 회전하니 서울의 동서남북 방향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정상 봉수대 옆에는 하얀 옷을 입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짙은 눈썹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인도 청년 2명이 야경을 즐기고 있어, 나는 이화여대에서 약학을 전공한다는 잘 생긴 청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언제 배웠는지 세련한 발음으로, “하나, 둘, 셋” 하며 사진을 찍었고, “나는 예쁜 여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니 좋지요?”라고 서툰 영어로 얘기하니 그는 싱긋 웃었다.


또한 내가 안산에 오를 때마다 30분이고 마냥 앉아서 홍제동 방향을 쳐다보던 평평한 바위는 미국 보스턴과 프랑스 칸느에서 온 청년 2명이 서울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 야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바위틈에 들어가 인왕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고, 그들 외국인들이 자고 있는 모습도 재미있어 몰래 찍었다.


그런데 8시에 온다는 H전화는 없었고, 정상에서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홍제동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H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몇 마디 들리다가 끊겨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20분이 넘었고, 자세히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그가 8시부터 7~8차례 전화했던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다.


“산 정상이라 통화가 두절되고, 음질이 불량인가!” 의심하면서,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수풀 사이 좁은 길을 플래시로 비춰가며 서둘러 내려갔다.


8시 40분, 홍제동 한양아파트 상가에서 근 1년 만에 KFC 할아버지 같이 생긴 백발의 신사인 H를 다시 만났고, 다른 친구들은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시원한 생맥주집에서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눴고, 지나간 학창 시절을 되새겼으며, “우리 모두 젊게 그리고 멋있게 살자” 하며, 통닭과 매운 골뱅이 파무침 국수를 혀를 달래 가며 맛있게 먹었다.


헤어지면서, 나는 함께 야간 산행한 두 친구에게 “오늘 처음으로 안산에 올랐으니 일기장에 쓸 얘깃거리가 생겼네” 하고 농담하니,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좋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였다.


다음에 안산에 오를 때에는 내가 즐겨 찾던 평평한 바위에 앉아,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깊도록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보온병에 든 따끈한 다방커피를 마시며, 내 좋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작가의 이전글 안산 둘레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