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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Mar 14. 2024

말하지 못하는 사랑

김연수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언어의 힘과 한계에 대해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전적인 이해와 완벽한 오해에 대해 생각합니다. 말을 잘해야 하고 잘 들어야 하고. 말 잘못해서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천냥 빚을 갚는다는 이야기도요.


사랑해, 하고 말할 때 사랑은 제한됩니다. 부정확하고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들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너무 사랑하고 진짜 사랑하고, 죽도록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미칠 듯 사랑합니다. 스스로 속다 보면, 어쩌면 말하지 못하는 사랑이 사랑의 절대 원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제 연초록 꽃망울을 보았습니다. 가로수들도 무릎담요를 치웠습니다. 아침은 아직 춥네요. 감각도 언어처럼 모호하고 개별적입니다. 누군가 벌써 봄에 취했는지 전철 안으로 술냄새가 번지는 아침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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