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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Apr 12. 2024

아마도의 세계

다섯 개의 은반지는 길게는 30년에서 짧게는 5년의 시간 동안 함께 했는데요.  온 세상이 독이라는 듯 처참하게 변했는데 치약으로 닦아 보아도 원래대로 되지 않아 버려야 하나 고민하다 시간이 갔습니다.  두 개는 파리출장길에, 한 개는 도쿄 출장길에, 하나는 홍대입구에서, 하나는 은공예 수업에서 만들었습니다. 반지를 사서 처음 손에 끼우던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고단하고 지루했던 것 같습니다. 불안이야 기본값이었고요.


메리 카는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에서 말합니다. 실력 있는 작문 교사가 어쩌면과 아마도의 영역에서 글을 쓰도록 가르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요. 위대한 작가는 어렴풋한 기억을 역시 어렴풋하게 그려낸다고요. 바로 그 때문에 독자는 작가를 신뢰할 수 있고, 신뢰가 곧 감동이라고요. 하지만 제 생각엔 어쩌면과 아마도야말로 모든 시간의 기본값 같습니다.


그때 출장길에 설레고 보람된 걸음이었지만 어쩌면 힘들고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제가 할 일이란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낚아 채집하고 분석하는 것이었는데요. 제 기준이 아니라 회사의 기준이었으니까요. 빠르게 만들어지고 파기되는 패션의 흐름은 아름답지만 간교하지요. 이게 좋다고 내밀고 소비자가 구매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이게 더 좋다고 유혹해야 하니까요. 새 옷들이 줄줄이 헌 옷 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아마도요.


패션스트리트를 돌며 소비자 구매행태를 분석하고 다음 시즌의 패션을 기획하는 일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의심과 불만족을 부채질하는 마케팅의 집요함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좋지만 그래서 싫은 출장길, 스스로를 위해 뭔가 사주자고 고르던 반지들입니다. 오후였고, 다리가 아팠고, 목도 말랐어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은 제법 커리어우먼 비슷했지만 편하진 않았습니다. 변하는 것들에 대한 염오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갈급을 불러왔지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변해버린 반지가 돌아왔습니다. 그걸 닦는 약이 있더라고요. 이럴 줄 모르고 새 은반지를 두 개나 샀어요. 새로 산 덕분에 옛 반지 소생 방법도 찾았지요. 새 반지들이 흑변 하여 닦는 순간이 오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삶의 마디마디 선택의 근거가 있습니다.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다시 왼쪽이 아니라 앞쪽으로 가다가 뒤로 몇 걸음, 이렇게 가다 보면 최종의 걸음이 되겠지요. 좋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최선이었을 겁니다. 아마도요.


(제목은 제 시에서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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