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박은경 May 11. 2024

저 기도

붉은 점퍼 아래로 흰 블라우스 레이스가 보입니다. 붉기는 붉지만 빛이 빠져나간 붉음입니다. 희기는 희지만 빛이 빠져나간 빛입니다. 시간과 먼지가 스며든 것처럼 보여요. 일자형 검정 바지 밑으로 갈색운동화는 225 남짓. 검은 꽃잎 같은 모자를 쓰셨어요. 금실이 프린팅 된 아이보리 장갑을 끼고 계십니다. 그 손으로 책 같은 것을 들고 작게 소리 내어 읽으십니다. 흰 종이의 필사본이었어요. 불경이 적혀있어요. 정갈한 필체로 줄을 맞추어 쓰여있습니다. b4 사이즈,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책에는 중간중간 굵고 진하게 쓴 글자들도 보입니다. 검정 마스크 속으로 외우는 불경은 정확지는 않고 높낮이만 구별되는 웅웅거림입니다. 저 기도는 평온이나 고요, 안정 그런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하고 긴급할 것 같습니다. 누가 돈을 준다고 해도 저렇게 집중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저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실 것 같습니다. 언제 저런 기도를 해보았던가, 묻습니다. 저 기도를 꼭 들어주십사 기도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 코너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