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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May 28. 2024

디그레션에의 기대

"인생은 내러티브와 다르다. 삶은 기승전결의 플롯을 지니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과 대단원을 전제로 인생을 서사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반영하고 나아가 현실의 논리를 드러낼 뿐이다.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러티브는 살아 있는 것의 존재 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와는 무관한 수많은 디그레션으로 가득하다. 실은 그 디그레션들 자체가 삶이라고 해야 한다. 삶은 삶이 존재하는 구체적 순간들의 평등한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현재도 느낄 수 없고, 진짜 삶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삶의 의미와 무의미조차도." (이장욱, <영혼의 물질적인 밤> 중)


digress는 주제에서 벗어나다.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습니다. 다들 잘하는 것이 그것이네요.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에서는 조금 비껴가고 싶습니다. 기승전결이나 내러티브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고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거역할 수가 없다고요. 수많은 우연들이, 얼떨결의 서사들이 삶을 이루어낸다고요. 거기에는 숭고한 우주의 계획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미친 듯 염탐하고 조정하며 선을 넘는 알고리즘의 섭정 또한 한몫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어떤 디그레션에는 편승하고 어떤 디그레션은 이겨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기꺼이 수용해야하는 디그레션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기대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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