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내러티브와 다르다. 삶은 기승전결의 플롯을 지니지 않는다. 의미와 목적과 대단원을 전제로 인생을 서사화하여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품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반영하고 나아가 현실의 논리를 드러낼 뿐이다.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러티브는 살아 있는 것의 존재 방식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와는 무관한 수많은 디그레션으로 가득하다. 실은 그 디그레션들 자체가 삶이라고 해야 한다. 삶은 삶이 존재하는 구체적 순간들의 평등한 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현재도 느낄 수 없고, 진짜 삶도 느낄 수 없다. 심지어 삶의 의미와 무의미조차도." (이장욱, <영혼의 물질적인 밤> 중)
digress는 주제에서 벗어나다.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다는 사전적 의미를 갖습니다. 다들 잘하는 것이 그것이네요. '삶 자체는 그것을 훨씬 초과하거나 그것을 무시한다'에서는 조금 비껴가고 싶습니다. 기승전결이나 내러티브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고요. 무시하는 게 아니라 거역할 수가 없다고요. 수많은 우연들이, 얼떨결의 서사들이 삶을 이루어낸다고요. 거기에는 숭고한 우주의 계획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미친 듯 염탐하고 조정하며 선을 넘는 알고리즘의 섭정 또한 한몫을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어떤 디그레션에는 편승하고 어떤 디그레션은 이겨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기꺼이 수용해야하는 디그레션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기대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