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병약함에 허물어지는 마음을 돌아봅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마음이 아프다가 금방 잊어버리겠지요. 타인이라면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타인이 아닌가요. 명백히 그는 내가 아니므로 타인이지만 분리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하므로 끝까지 타인이기는 어렵습니다. 주말드라마 <미녀와 순정남>에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엄마를 (가까스로 살아나 이전을 잊고 다른 얼굴로 살다가, 기억을 되찾은) 여주인공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밉고 싫고 원망스러운 엄마와 절연하려다가 다시금 얼굴에 피어나는 양가감정이 있었습니다. 다시 엄마에게 당하며 살아갈지 차후의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절연이란 정말 힘들 겁니다.
조안 할리팩스의 책 <연민은 어떻게 삶을 고통에서 구하는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작가는 타인을 돕고자 하는 열망과 관련된 선행이 종종 그림자를 가지고 있음을, 그 고통스러운 자질들을 '벼랑 끝 상태'라고 부릅니다. 공감은 공감 스트레스로, 진정성은 우리 삶에 도덕적 고통을 가져올 수 있고, 존중은 무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참여에는 소진이 결과로써 따라올 수 있다고요. 해결책으로는 스스로에게 "GRACE"의 초기방식을 적용했다고요.
1. 주의를 모으기 Gathering our attention
2. 의도를 상기하기 Recalling our intention
3. 자신에게 조율한 후 타인에게 조율하기 Attuning to self an then other
4. 무엇이 도움이 될지 숙고하기 Considering what sill serve
5. 참여한 후 상호 작용 끝내기 Engasing and then other
연민은 단순히 연민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연민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 감정 자체는 무력합니다. '무엇이 도움이 될지 숙고'하고 행동하고 상호작용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하는 방법이 제게도 유효했습니다. 백 프로는 아니지만요. 그의 상황에 대한 아픔, 그의 '고통에 압도'될 때 그 순간이 '낯설지 않은 위험한 벼랑의 끝'임을 알아차리고 '동일시가 통제 불능의 상태'로 이어지기 전에 스스로를 포함한 전체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의 방향을 잡고 있으려고 심호흡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