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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Aug 19. 2024

아버지는 타인입니까

아버지의 병약함에 허물어지는 마음을 돌아봅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마음이 아프다가 금방 잊어버리겠지요. 타인이라면요. 그렇다면 아버지는 타인이 아닌가요. 명백히 그는 내가 아니므로 타인이지만 분리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하므로 끝까지 타인이기는 어렵습니다. 주말드라마 <미녀와 순정남>에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엄마를 (가까스로 살아나 이전을 잊고 다른 얼굴로 살다가, 기억을 되찾은) 여주인공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밉고 싫고 원망스러운 엄마와 절연하려다가 다시금 얼굴에 피어나는 양가감정이 있었습니다. 다시 엄마에게 당하며 살아갈지 차후의 전개는 알 수 없으나, 절연이란 정말 힘들 겁니다.


조안 할리팩스의 책 <연민은 어떻게 삶을 고통에서 구하는가>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작가는 타인을 돕고자 하는 열망과 관련된 선행이 종종 그림자를 가지고 있음을, 그 고통스러운 자질들을 '벼랑 끝 상태'라고 부릅니다. 공감은 공감 스트레스로, 진정성은 우리 삶에 도덕적 고통을 가져올 수 있고, 존중은 무시로 이어질 수 있으며 참여에는 소진이 결과로써 따라올 수 있다고요. 해결책으로는 스스로에게 "GRACE"의 초기방식을 적용했다고요.


1. 주의를 모으기 Gathering our attention

2. 의도를 상기하기 Recalling our intention

3. 자신에게 조율한 후 타인에게 조율하기 Attuning to self an then other

4. 무엇이 도움이 될지 숙고하기 Considering what sill serve

5. 참여한 후 상호 작용 끝내기 Engasing and then other


연민은 단순히 연민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연민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 감정 자체는 무력합니다. '무엇이 도움이 될지 숙고'하고 행동하고 상호작용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하는 방법이 제게도 유효했습니다. 백 프로는 아니지만요. 그의 상황에 대한 아픔, 그의 '고통에 압도'될 때 그 순간이 '낯설지 않은 위험한 벼랑의 끝'임을 알아차리고 '동일시가 통제 불능의 상태'로 이어지기 전에 스스로를 포함한 전체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삶의 방향을 잡고 있으려고 심호흡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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