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와 용기 사이에서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빛나는 자격증을 가졌으며, 젊음이라는 눈부신 자산을 가진 Q는 모든 가능성을 뒤로한 채 단순한 일을 하며 삽니다. 전공과도 역량과도 무관한, 단순 반복적 영업직이지요.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제법 선명합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임시직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절친인 M은 Q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 그릇에 맞는 곳으로 옮겨가. 지금은 마음껏 시도하고 실패하며 성취를 맛볼 시간이지, 이렇게 안주할 때가 아니야.” M의 외침은 애정 어린 조언이었지만, Q에게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Q는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방어벽을 세우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이 지점에서 자꾸만 평행선을 긋습니다.
Q가 그 자리에 머무는 이유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발현된 심리적 방어기제일지도 모릅니다. 높은 학벌과 스펙은 때로 무거운 독이 되기도 하니까요. ‘더 큰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 겪을 타격을 감당하기보다, 본전의 경기장에 들어서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당장 손에 쥐어지는 보상은 달콤하고, 치열한 경쟁 끝에 찾아온 번아웃은 그를 ‘머리를 비운 노동’의 평안함 속으로 숨게 만듭니다.
단순히 ‘조용한 포기’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실용적 단순함을 지향하는 ‘요노(YONO)’적 삶이라 보아야 할까요. 과거의 ‘욜로(YOLO)’가 화려한 과시였다면, 지금의 ‘요노’는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쳐내고 본질적인 생존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Q는 명예나 책임이라는 복잡한 장식 대신, ‘수입’이라는 가장 확실한 목적지 하나만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공의 방정식은 해체되었습니다. 정규직이 되어도 내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든 허무주의의 바다 위에서,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 현재의 확실한 고수입을 택하는 실리주의는 Q에게 정당한 명분이 됩니다. 하지만 M은 여전히 탄식합니다. 잠재력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쓰이지 않고 방치된 능력은 결국 퇴보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M에게 노동이 ‘나를 증명하는 확장’이라면, Q에게 노동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교환권’처럼 보입니다.
이 대화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속도로 삶을 항해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Q에게는 지금의 안주가 진정한 만족인지, 상처받기 싫어 선택한 ‘유예’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M에게는 조급한 압박보다는, Q가 느끼는 불안의 실체를 먼저 들여다보고 그의 역량이 발휘될 때 얻을 ‘정서적 효능감’을 조심스럽게 일깨워주는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누구의 편에 서야 할까요.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과연 어떤 길을 택할까요. 사실 이것은 특정 연령대의 고민만은 아닐 것입니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마주하게 되는 근원적 질문이지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빛과 그림자는 공존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는 안주하고 싶은 Q와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M이 동시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서 있는 곳이 따스한 ‘안식처’인지, 나를 가두는 ‘감옥’인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일일 것입니다. 최선의 선택이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선택한 삶을 최선으로 만들어가려는 용기만이 있을 뿐이지요. 각자의 속도로 건너는 이 항해에 따스한 순풍이 불어오길 응원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끝에 당신만의 고유한 의미가 닿아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