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
아이들과 저녁에는 간식들을 먹으면서 온 가족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시간들이 몇년째 이어지면서 그래도 아이들이 그 시간을 지켜주는 것에 감사해서 아이들이 좀 더 커서는 자기들이 먹고 싶은 간식을 사오도록 해주는 편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빚때문에 모든 것을 털고 처가어른들이 허락해 준 방 2개로 지낼 때였습니다.아이들이 과자와 음료수를 먹고 있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보통 8시즈음에 모이고 처가 어른들 댁에서 지내고 있기때문에 늦은 시간에 주방에 들어가서 뭔가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 배고픈 것을 해결해주고 싶어서 머릿속으로 고민을 좀 해봤습니다.
봉지..
봉지라면..
떠오른 것은 '봉지라면'이었는데 이 음식은 결혼전 느낀 '감동과 감사' 그 자체였습니다. 아주 먼 옛날, 군대에서 쫄병때였습니다. 야간 보초를 서고 들어오는 겨울에는 배는 고프지만 야식을 먹을 수 있는 계급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배고파서 건빵 두어개를 더블백에서 꺼내먹고 누웠습니다. 누워있는데 같이 보초를 섰던 선임이 조용히 불렀습니다. "나와라!!"라는 선임의 말에 슬리퍼를 신고 선임이 손 흔드는 내무반과 연결된 세탁실로 갔습니다. 선임은 플라스틱 수통에 더운물을 받아와서 라면봉지에 붓고 있었습니다. 저는 쫄병이라서 6.25때 썼던 철수통을 쓰고 있어서 선임의 플라스틱 수통 자체만으로도 부러웠습니다. "잡아라. 너꺼다." 뜨거운 물을 넣은 한 봉지를 건네주면서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봉지는 짜파게티였습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세탁실 문을 열고 물을 어느 정도 버리고 선임이 시키는대로 수프를 넣고 비볐습니다. 비비는 봉지에서는 세계 최고 요리의 향기가 나는 것같았습니다. "얼른 먹고 자자" 그 말에 내무반 최고참이 시끄럽다면서 혼낼까봐 얼른! 조용히! 퍼 먹었습니다. 한 젓가락씩 입안에 넣을때마다 입에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 한 국자씩, 마음에는 감동이 한 양동이씩 쌓이는 것같았습니다. 그 시절 그 느낌이 떠오르면서 '봉지라면'이 가장 좋을 것같았습니다.
"가서 짜파게티 5봉지 사와라"
아이들은 늦은 저녁에 짜파게티를 끓여준다는 생각에 얼른 가위바위보를 하더니 진 사람 둘이서 잽싸게 뛰어가서 사 왔습니다. 그 사이 아내에게 부탁했습니다.
"여보, 전기 포트로 물 좀 끓여줘요."
아이들이 사 온 짜파게티를 한 봉지씩 나눠주고는 봉지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 두드려서 내용물을 부수라고 했습니다. 막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두드리다가 봉지가 터졌습니다. 내용물이 자잘하게 부숴진 봉지에다가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아이들은 봉지라면을 끓여 줄줄 알고 기다렸는데 부수라고 하고 거기에다가 물을 부우니까 매우 신기해하며 아빠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물을 다 붓고 나서는 아직 분리하지 않은 나무젓가락으로 입구를 빨래집게처럼 집어줬습니다. 5분여 시간이 흐른뒤 아이들에게 봉지를 열어서 위아래로 저어주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아빠가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둘째딸이 덤벙대다가 봉지속 국물을 흘렸습니다. 잘 젓고나서는 다시 나무젓가락으로 입구를 집어 줬습니다. 두번째 기다림의 시작입니다.
과자를 놓고 먹던 방안의 작은 탁자에는 각자의 짜파게티 봉지 5개가 나무젓가락으로 입구가 봉해진 채 대기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그것만 바라보고 있고요. 가끔 눌러보기도 하고요. 3분정도 더 지나서 봉지를 열라고 했습니다. 다시한번더 휘저어주면서 면이 충분히 불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습니다. 면이 잘 불은 것같다는 아이들 말에 물을 버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일어서서 들고가는 모습이 너무 불안해서 멈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물 버릴 통을 가져다달라고 했습니다.
세탁실 바깥에 물을 버리던 그 느낌 그대로 봉지를 오므린채로 아내가 가져온 통에 물을 버리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방에서 아빠의 지시대로 깔깔거리면서 짜파게티 봉지의 물을 버렸습니다. 뜨겁다고 징징하는 막내딸 것은 제가 해주고요. 그런 과정들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엄청 즐거워했습니다. 물을 한 숫갈정도 남기도 수프와 건더기를 넣고 비비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휘자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악기 연주자같고요. 어찌나 말을 잘 듣고 척척 해내는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손에 짜장을 묻혀가면서 봉지에 나무젓가락을 넣고 열심히 비비적거리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했습니다.
거의 다 비빈 것을 확인하고는 아이들에게 이제 먹어보라고 했습니다. 적당히 꾸덕꾸덕하면서 면이 불은 것같은데 뭔가 절묘한 느낌의 짜파게티를 처음 먹어본 아이들은 저마다 "오오~" "맛있네요." 라면서 세상 가장 즐거운 놀이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그것도 잠시 금새 다 먹었습니다. 진짜 신기했습니다.
"다 먹었으면 봉지에 나무젓가락 넣고 잘 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와라!! 끝"
아이들은 우르르 일어나서 거실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쓰레기통에 짜파게티 봉지를 버리고 우르르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처가 어른들은 거실에서 티비를 보시다가 궁금해하셨습니다. '사위가 애들이랑 또 뭔가 했나 보네'라고 생각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날은 제가 마법사가 된 날입니다. 냄비도 불도 없이 맛있는 짜파게티를 방에 앉아서 먹게 해준 날이기때문입니다. 마치 마술사가 종이봉투 안에 물을 부었는데 뒤집으면 물이 안 흐르는 것을 보고 놀란 것처럼, 짜파게티 안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먹을 수 있는 짜파게티 요리가 되었으니까요.
군대시절 선임에게 감동하며 감사로 먹었던 짜파게티 봉지라면의 추억을 되살려서 아이들에게 해줬더니 아이들이 아빠에게 엄지 척해준 날입니다. 아내도 처음 먹어본다면서 재밌어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즐긴 '봉지라면의 첫 즐거움'때문에 우리는 처가에서 지내는 동안 늦은 저녁이나 영화를 보다가 밤에 방에서 종종 해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엄청 좋아했습니다. 아빠가 알려준 재밌는 요리라면서요.
엄청 재밌었지만 이제는 필요 없는 기술입니다.
이제는 우리 집이 있고요. 아이들이 봉지라면에 물을 부어서 먹을 일도 없습니다. 초4 막내딸을 빼고는 중2, 초6 둘째 딸은 필요하면 자기가 직접 끓여 먹으니까요. 이런 것을 느끼면서 모든 것이 '한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 때 참 즐거운 놀이이자 요리였다.'라면서요. 그렇지만 그 '한 때'를 놓치지말고 '함께' 잘 즐겨야 악몽이 아니라, 추억이 된다라는 진리를 깨달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여전히 아이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가 하는 행동, 말, 놀이들이 아직은 아이들이 궁금해하고 재밌어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이제는 재밌어해주는 것입니다. 롤모델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재밋거리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한 때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자라는 속도와 눈높이에 맞는 아빠가 되자.
아이들은 자랄수록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 생각의 폭에 맞도록 아빠의 생각주머니도 커져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지금은 재미없어하고 필요없는데 그때 재미를 느끼자면서 여전히 '봉지라면 먹기'를 권하면 아이들은 짜증을 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빠가 배우는 교육 커리큘럼은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속도와 눈높이에 맞는 대화와 생각을 하도록 업그레이드 중입니다.
아이들과 진짜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즐겼던 시간에 대해 나눠보았습니다. 진짜 몇백 원짜리 놀이이고 아빠의 군대경험에서 나온 것인데 아이들이 엄청 좋아하고 재밌어해서 한때 많이 즐겼습니다. 다양한 라면들을 시도해봤는데 너구리같이 굵은 면발은 실패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면발 가는 라면과 비빔면, 짜파게티가 최고였습니다. 재미없어할까봐서 라면을 바꿔가면서 해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엄청 즐거운 방구석 놀이였습니다. 군대시절 경험도 아이들과의 놀이가 될 수 있어서 저로써는 매우 뿌듯했습니다. 그런 뿌듯함과 더불어서 읽어주시는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움과 기쁨이 두 배가 됩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항상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큰사람(바람 없이 연 날리는 남자 Dd)
출처:사진: Unsplash의Sanju Pand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