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사랑하는 딸에게
너와 살고 있으면서 요즘에는 혼란스러운 날들이 많네. 어렸을 때 아장아장할 때부터 걸어 다니고 말을 쫑알쫑알할 때까지 손을 잡고 다니면 자랑스러울 때가 많았지. 사람들이 인형 데리고 다닌다면 이뻐해 줘서 엄청 자랑스럽기도 했지.
그런 너와 지내면서 점점 키가 커가고 마음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혹여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건드리거나 말 걸면 안 되고 함께 다닐 수 없는 존재가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단다.
그런 두려움으로 오빠에게 조심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너를 보며 화를 내고 미워하고 정말 감정을 섞어서 혼내는 날들이 많아지는 게 너무 걱정이 되더라. 사춘기라서 잘 상대해줘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내 딸은 안 그럴 거야!'라는 기대로 지내다 보니 '내 딸도 이러다니!'로 느낄 때마다 자꾸 화를 내고 있네.
화를 낼 때마다 사춘기와 함께 중1의 시간을 병행하는 네가 한 발짝 한 발짝 멀어져 가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이 힘들더라.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같이 하지 않도록 하다 보니 이제 '품 안의 딸'보다 '우리 집 딸'로 느끼는 것도 어색한데 한 발짝 한 발짝 멀어질 때마다 다시 좁혀가느라 두 배로 힘들더라.
그렇게 수시로 한 발짝 다가오게 하면 두 걸음 멀어지는 너를 보면서 '막내도 이렇게 되겠지'라는 생각까지 하는 날은 마음이 휑하더라. 그런 너와 새 학기가 시작되려고 준비를 하면서 오랜만에 많이 놀랐다.
요즘에는 화가 나서 소리 지를때빼고는 엄마와 소곤소곤, 막내와 소곤소곤, 친구랑 조용히 속닥속닥, 카톡으로 톡톡톡 외에는 목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없거든. 서로 약속을 하다 보니 짜증을 내거나 아빠가 혼낼 때 '네'만 짧게 하면서 참아주느라 네가 원해서 대화를 이어갈 날이 별로 없네.
그런 네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엄마가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 거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그렇게 대답하고 보니 진짜 그렇더라. 거의 기분 좋게 이쁜 목소리로 말하는 날이 요즘 거의 없는데 엄청 이쁜 목소리와 기분이더라. 새 학기 맞아서 네가 그렇게 원하던 '에어포스 흰둥이'와 '망주머니가 있는 너만의 가방'을 사려고 모든 가게를 돌아다니는 날이었어. 그런 날이라서 그렇게 낭랑한 목소리와 밝은 기분으로 설레고 들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직 너에게 해 줄 수 있다.'
'네가 엄마 아빠와 이렇게 즐거울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니까 행복하고 울컥하더라. 물론 알지. 너의 지금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인 것을 알기에 조심하려고 하는데 참 안되네. 하기 싫은 거 하라면서 혼내고 안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하려고 할 때마다 제지하느라 혼내고 그런다. 아빠가 자꾸 실수하고 자꾸 그러네. 조금만 이해해 주면 얼른 고칠게.
"다른 아빠는 딸바보라는데 아빠는 너무 무섭고 무서워"라는 말이 마음에 콕 와닿으면서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너의 외침으로 들렸어. 너의 성장과 함께 아빠도 발맞추기 잘할게.
너의 낭랑하고 들뜬 그 얼굴과 목소리를 또 듣고 싶네.
아빠만 잘하면 될 것 같아.
네가 원하는 거 해주고
네가 하는 말 들어주고
그렇게 노력할게.
아빠 마음의 사랑이
자꾸 미움과 엉뚱한 말로 가려지지 않도록
바짝 노력할게.
여전히 널 사랑하는 아빠가.
드디어 그날이 온 것입니다.
오빠가 중1 올라갈 때 졸업과 입학기념으로 원하는 대로 축구공과 브랜드 축구화를 사줬습니다. 그걸 보면서 둘째 딸이 2년을 기다린 끝에 중1 입학할 날이 왔습니다. 중학교 입학이라는 중압감보다 드라마처럼 치마교복을 입는다는 것과 원하는 졸업/입학 선물을 오빠처럼 고를 수 있다는 것이 설렘 그 자체였습니다. 딸이 선택한 것은 오빠가 신는 '에어포스 흰둥이'와 인형, 화장품 넣어 다닐 수 있는 망주머니가 맨 앞에 있는 백팩이었습니다. 그런 날이 2년 만에 왔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제가 들고 다닐게요.
요즘에는 그런 말을 들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들고 갈게요.'라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하도록 권하거나 들도록 말하면 '싫어요 '라는 말이 더 앞섭니다. 그런 딸이 "제가 들고 다닐게요."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쇼핑백이 두 개였는데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을 고르고 산 것이라서 그 무게를 자기가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낭랑한 목소리, 들뜬 표정이 오랜만에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가 엄청 반가워할 정도였습니다.
늘 그렇게 되도록 해주는 게 부모인데 말입니다.
꼭 필요한 것을 진짜 원할 때는 가지도록 해주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능하면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인데 말입니다. 반면에 그런 상황마다 제가 하는 말은 "좀 있다가 사자." "나중에 하면 안 될까"입니다. '지금 당장'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과 '나중에, 제발 나중에,라고 말해야 하는 저와 괴리감이 큽니다. 이렇게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될 줄 몰랐는데 당황스러운 날들이 이어지는 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 여러 개, 방학 때마다 다른 나라 여행, 어학연수, 국내 여행 마음껏(다른 아이들처럼 체험학습계획제출하고), 유행하는 옷 사기, 휴대폰 마음껏 하기를 하나도 '마음껏'하지 못하는 현실을 속상해하는 삼 남매 앞에 마음은 '키다리 아저씨'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낭랑한 목소리의 들뜬 표정의 딸과 보낸 하루가 너무 기뻐서 그 마음을 담아 감사와 사과, 그리고 다짐을 담아 적어 봤습니다. 더 능력자이지 못한 제가 한스럽기도 합니다. 원하는 거 할 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아이가 보기 좋기도 했습니다. 읽어주심에 늘 감사하며 읽어주시니 또 편지를 쓰면서 깨달아가는 것 같습니다.
큰사람(by 바람 없이 연 날리는 남자 Dd)
출처: unsplash의 Vitaly Garie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