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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패셔니스타 바보

새빨간

나는 동네에서 이런 오해도 받았다.

패셔니스타.


학교 다닐 때 패션잡지를 모으고 패션쇼 자료까지 찾아보곤 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양한 소재로 표현되는 것과 형형색색 색깔들을 볼 때마다 아주 짜릿했다. 청담동 '앙드레김 의상실'을 지나갈 때면 '나도 꼭 패션일할 거야.'라고 했었다. 그런 생각이 시발점이 되어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했고 11년간 패션회사에서 일도 했다. 여름에 겨울옷을 기획하는 것처럼 다가올 미래를 예측해서 열심히 만들고 계획하는 것이 신났었다.  우리가 기획한 의도대로 옷들이 판매가 될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특이하거나 디테일이 남다른 옷들을 사서 입었다. 그런 화려하고  범상치 않은 옷들을 아내는 보기 힘들어했다. 결혼 후 차츰 버려야 했다. 그렇지만 미련이 남는 옷들은 버리지 못하 옷장에 남겨 두었다. 가끔 꺼내서 만져보곤 했다.


"당신이 입던 건가요? "


"이걸 입고 다녔어요?"


아내는 정말 당황해하며 묻더니 바로 이어서 말했다.

"나는 안 입었으면 좋겠어요. 남편."

"내 상식으로는 감당이 안 돼요. "


어떻게 그런 반응이 나올까? 그날 화제의 대상은 빨간색 티셔츠이다.  반팔소매에는 토트넘 유니폼처럼 라인이 둘러 있고 가슴판에는 해골이 가슴부터 배까지 큐빅으로 새겨진 디자인이다. 15년 전 더운 여름 부츠컷바지와 신나게 입었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2006년 개봉된 '나초 리브레'에서 주인공 이그나시오가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인데 레슬러가 되고 싶어서 레슬러 복을 만지작 거리는 영화 한 장면 같았다.

 

아내는 재차 당부했다.

'버려주길! 요' '이런 옷은 나도 안 입는데... 당신이...'

간곡히 부탁했다. 아내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몇 마디 말들이 그냥 넘어갈 수 없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당신이....(입었다고요? 남편.....)......" 그런 말로 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여보! 그 빨간 티셔츠 어제 버렸어요."

"잘했어요. 남편. 그런 옷들 나는 상상도 못 해요

그런 옷 입은 당신을 감당할 수 없어요."

"알겠어요. 당신이 너무 힘들면 안 입을게요."

아내 맘을 몰라서 맨날 감정적으로는 벽처럼 굴면서도 이런 것들은 바로 실행했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커 가지만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내 옷이었다. 돈을 아낀다고 새 옷은 잘 안 사고 입던 옷을 입겠노라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가끔  "XX아빠는 옷을 잘 소화하네요. 옷 입는 게 조금 돋보이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했다. 15년 전 옷들을 입고 다니니까 마치 젊은 감각으로 입는 애아빠같이 된 셈이다. 즘 옷들이 아니니까 독특하게 보일 수도 있다. 돈을 아낀다고 15년 전 옷을 여전히 입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옷을 살 때마다 여전히 그 감성으로  젊은 감각의 옷을 사 입는 내가 문제였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감당'하고 있었다.



'자멋취'



해 사는 사람... 또래 사람들과 가정생활에 대해 대화하다가  모습을 점검해 보게 되었다. '나만 애처럼 입었네..' 그리고 뒤이어  '아이들이 어리지 내가 어린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아빠가 안 입었으면 하는 옷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생각이 자라 가는데 내 옷과 생각은 함께 자라지 못한 것이었다. 돈을 아낀다는 명분 속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옷을 사야 할 때면 조금이라도 내 취향이 반영된 옷을 사려고 아등바등했다. 비슷한 연령대의 학부형과 마주치면 '깜짝 놀랄' 옷들을 입고 있기도 했다.


발행글 참조: "나는 동네 백수 취급받는 남자"

https://brunch.co.kr/@david2morrow/77

  

깨닫고 난 후에 아내와 아이들이 입지 않았으면 하는 옷들은 과감히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생각들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런데, 일반적이지 않은 옷들을 버린 후에 신기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거 XX 아빠가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 같아서요. 우리 남편은 안 입는대요. " 라면서 범상치 않은 옷들이 나에게 '나눔'이 되기 시작했다. 눈 내리는 날 강아지처럼 내 마음은 뛸 듯이 기뻤다.

'돈 아낀다고 옛날 옷들을 그대로 입었고 이제 그런 옷 그만 입으라고 해서 버렸더니 요즘 감성의 독특한 옷들이 '나눔'되기 시작한다. 야호!!!'

'나눔'되는 옷들이 입던 옷이던 사이즈 실패 구매옷이던 상관없이 내게 '나눔'되는 옷은 감사하며 받았다. 사이즈가 맞으면 더 큰  "감사"로 여겼다. 이제 내 스타일은 없다.  '나눔'받은 옷들을 가지고 조화롭게 맞춰 입고 산다. 이것도 진짜 "감사"이다. 그렇지만 '나눔'받은 옷을 입고 '나눔'해준 사람과 동네마트에서 만나면 조금 창피하다. 아직 해탈의 경지는 아니긴 한가보다. 나름의 원칙도 만들었다. " 아빠! 이건 쫌" " 남편,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에는 '나눔'받은 옷의 퀄리티와 가격을 떠나서 바로 포기한다. 이제 옷을 살 때는 저렴하고 무난한 옷만 구매한다.

  


내가 이제야 정신 차려지나 보다.  

평범한 동네 애아빠가 되어간다.

한때 의류회사 다닌 감성으로 돈을 허비하며 '패셔니스타'같은 착각의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깨끗이 빨아서 단정하게 입은 동네'아빠니스타'로 자리 잡아간다.



나는 패셔니스타가 아니다. 세 아이의 아빠이며 평범한 월급쟁이.




현재 상황에 맞게 옷 입고 행동하니까 아이들도 안정감을 찾아간다. 매번 특이한 것에서만 즐거움을 느끼도록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 같다. 요즘은 평범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도록 가르친다. 글을 적을 때마다 나의 부족했모습들이  선명해지면서 그것을 다시 직면하는 내 얼굴은  화끈거린다.  쓰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이런 나를 참고 기다려준 아내가 고맙게 느껴진다.


가정을 내게 맡겨 주신 것에 감사하며 더 나은 가정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여보.


From 동네 아빠니스타 바보. 

 


사진출처: : UnsplashDylan Sauerw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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