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고, 홀에 나와보니 새로운 사람들이 몇 있었다. 설마 밑에서 올라온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고, 더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위의 롯지들 대부분이 부서졌고, 많은 트레커들이 하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존재하는 롯지도 목표치에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는 사람들로 꽉 차있어서 올라가 봤자 잘 곳도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우리 롯지에 묵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하산 준비를 했다. 어제와 달리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이대로 포기하는 게 몹시 아쉽긴 했지만 어제 겪은 고산병과 지진의 후유증, 전반적인 롯지들의 상태를 봤을 때 내려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치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한쪽 다리 근육이 쥐가난 듯 아프다. 지진을 피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근육이 놀란 듯싶었다. 두 시간쯤 내려갔을까, 저 멀리 롯지 하나가 보이고,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루클라 공항에서와 남체에서 만났던 줌마탐험대의 사무장님이다.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사무장님은 나를 보더니 괜찮냐고 소리를 지른다. 어디 다친데 없냐고. 다리는 왜 절뚝이냐고 묻는다. 이윽고 다른 줌마탐험대 어머니들과 대장님, 위원장님이 나오신다. 내가 연락이 안돼 걱정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대장님은 나를 혼자 보낸 것이 내키지 않았다며 미안하다고 하신다. 어머니들과 대장님은 내 다리를 치료해주신다. 점심을 다 먹고 다시 하산한다. 중간에 쉴 때 어머니 한 분이 내게 묻는다.
"가족한테 연락은 했니?"
"아뇨, 아무것도 안 터져서 못했어요."
"걱정하시겠는데, 이거 사용해서 얼른 연락드려."
부모님께 문자를 드렸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어떤 난리가 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줌마탐험대와 나는 루클라 마을까지 천천히 함께했다. 하산하는 동안 여진이 계속 났다. 새벽에 자다가 뛰쳐나오고, 걷다가 멈추고 피신하고, 공터에 멍하니 앉아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지진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여진의 효과는 우리를 점점 패닉에 빠트렸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하늘에서는 헬기들이 주야장천 떠다녔다. 위쪽 고지에서 나온 부상자와 사상자를 나르는 헬기였다. 헬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 롯지 주인은 EBC에서만 적어도 20명 이상이 죽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기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고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 피부 위에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있었다.
한 번은 새벽녘에 또 여진이 났다. 우리는 자다 말고 뛰쳐나갔다. 넓은 공터에서 별을 바라보며 긴장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외국인 트레커 한 명이 롯지 주인에게 물었다.
"술 있나요?"
"술 있죠. 근데 갑자기 왜요?"
"지금 이런 상황에 이렇게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면 무섭기만 할 거예요. 차라리 마시려고요. 다 같이 마시죠."
이런 상황에 술을 마신다고? 미친 거 아냐?라고 생각한 나와는 달리 저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지쳐있었다. 그래, 차라리 마시자. 두려움을 없애자! 뭐가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음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했다. 난과 짜파티, 신라면, 커리, 탄두리, 프라이드 라이스와 맥주가 나왔다. 우리는 먹고 마셨다. 흥이 돋는다. 가운데에 조그마한 장작불을 펴놓고 주위를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덴마크어, 독어, 각기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고 힘껏 껴안는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을 거라고 말해준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두려움의 불꽃을 우리 모두가 밖으로 꺼내 놓았을 때 우리는 그 두려움을 마주한다.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우리 다 같이 함께 한다면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더 세게 껴안았고, 더 과장되게 춤을 췄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히말라야 새벽녘에 떠오른 초승달은 덤덤히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드디어 공항이 있는 루클라 마을에 도착했다.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먼저 카트만두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하루 이틀 내에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숙소를 잡았고, 대장님과 나는 카트만두와 루클라 공항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닌다. 넓은 공터에서는 헬기가 착륙해있고, 그 옆으로 죽은 시신들이 가죽천에 둘러싸여 누워있다. 얼핏 봐도 10명은 넘어 보인다. 카트만두 상황을 들어보니 훨씬 심각했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져 10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루클라 공항에는 카트만두로 돌아가려는 세계 각국의 트레커들로 꽉 차있다. 인도는 전용기를 띄워 자국민들을 태워간다고 했다. 호주도 자국민을 데려가 우선 태국에다 내려놓는다고 했다. 캐나다도, 미국도 전용기를 띄워 자국민을 태워갔다.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기다리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웃긴 해프닝이 있었다. 내가 루클라 마을에 도착하고 와이파이를 켜보니 핸드폰에 불이 날 정도로 많은 카카오톡 메시지와, 페이스북 메시지, Whatsapp 메시지가 와 있었다. 타임라인에 올려놓은 사진과 내 페이지 또한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괜찮냐고, 살아있냐고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니, 며칠 째 연락이 끊긴 나를 부모님은 외교부에 실종신고를 하셨고, 외교부는 페이스북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을 가져다가 아침저녁 뉴스로 내보낸 것이었다. "홀로 네팔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던 25살 정힘찬 씨가 실종을 당했습니다."로 시작하는 앵커의 말은 나를 무사히 찾았다는 말과 우리 아빠의 인터뷰, 네팔 현지 상황에 관한 내용을 내보내고 있었다. 아침, 저녁 먹다 말고 뉴스에서 내 얼굴을 본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부터 시작해 중, 고등, 대학교 친구들까지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은 여러 방편으로 내 위치를 알아보다가 에베레스트로 떠나기 전 나와 함께 있었던 네덜란드 친구와 콜롬비아 친구에게까지 연락을 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내가 무사한지 알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뉴스에 나왔다는 이유로 외교부는 나를 찾기 시작했다. 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무사한지, 지금 나와 같이 있는지 물었고, 무사하다는 답변을 듣자 다행이라고 했다. '잘 챙겨서 귀국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루클라 마을에서 역시나 지진 때문에 하산한 두 명의 한국인 트레커를 만났다. 같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를 보자마자 "정힘찬 씨가 누구죠?"라고 말했고, 나는 "전데요"라고 했다. 그는 내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상태가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알겠다고 하고 그냥 나갔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옆에 있던 트레커들은 중요하지 않은가? 나와 같이 있던 줌마탐험대 어머니들과, 리더들은 중요하지 않나? 뉴스에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VIP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로 나를 찾고, 외교부에서 조차 나를 찾는 사람이 오다니. 더 어이가 없었던 건, 나중에 들어보니 그 사람은 외교부 사람도 아니었다. 카트만두에서 살고 있는 한인 회장 분이셨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을 파견해 내 생사를 물어본 것이다. '외. 교. 부'라고 써져있는 급조로 만든 형광색의 조끼를 입고 말이다.
우리는 루클라 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했다. 전용기가 언제 올지 알 수 없고, 기다리라는 답변만 들었다. 그동안 다른 나라의 국민들은 각각의 전용기를 타고 먼저 나갔다. 대기한 지 첫째 날, 미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고, 어떤 것이든 어려움이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라고 했다. 우리는 형제나 다름없기에, 너희를 위해 이곳에 있기도 하다고 말을 해줬다. 립서비스라고 해도 고마웠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미군은 바로 루클라로 날아왔고 자국민들을 챙겼다. 우리는 정부의 지시를 받을 때까지 대기하고 기다리다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다른 국민들이 다 떠나고 난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귀국행 비행편도 우리가 지불했고, 전용기도 아니었다. 정부는 우리에게 세월호 때처럼 그저 기다리라고만 했다. 그러니 일말의 기대도 생기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무언가를 해준 척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여진과 함께 발이 묶여 있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이 하나하나 떠나갈 때 그 모습을 보는 우리의 모습, 결국 그 많던 사람이 다 떠나고 텅 빈 마을에 한국인들만 남아있는 모습. 뉴스에 나온 사람만 챙기기 바쁘고, 그 외 다른 국민들의 생사는 관심도 갖지 않는 듯 보이는 행위가 위선적이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수습하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이런 의문점이 생긴다. 각자 개인의 결정으로 여행 와서 당한 재난재해를 국가가 나서서 해줄 의무가 과연 있는가? 예를 들어 태국 휴양지로 놀러 간 당신에게 갑자기 쓰나미가 덮쳐와 도시가 무너지고, 부상이 생기고, 사상자가 생겼다. 온 나라는 패닉 상태다. 비행기는 뜰 수 조차 없는 상태다. 그런 경우 국가는 무얼 하는가? 빠른 판단으로 전용기를 파견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가? 이 사태를 겪기 전까지 나는 국가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크게 다치지만 않았다면 우리 스스로도 알아서 잘 추스르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 해준 것이 없다 한들 서운하게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웃 나라들의 자국민 보호 정책을 보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좀 실망을 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최근(2020년) 네팔에 봉사를 간 교사들이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다가 실종을 당했고,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사건 당시 그들을 욕하는 수많은 댓글을 봤다. 봉사하러 갔다는 사람들이 히말라야엔 왜 갔냐며 죽은 건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는 댓글을 볼 때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봉사 시간 외, 학교가 문을 닫은 주말을 이용해 등반을 했다가 변을 당했다. 나도 학창 시절 자원봉사를 많이 다녔지만, 자원봉사 기간 동안 계속 봉사만 하면 병난다. 체력적으로, 심적으로 지친다. 쉬는 시간이 당연히 필요하고, 해외 봉사로 간 김에 봉사가 끝나면 여행도 한다. 어떤 자원봉사든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의 NGO에서 일하는 봉사단원들도 그렇게 한다. 피스콜, 자이카, 코이카, 유니세프, 한국의 비영리 단체들, 교회, 대안학교 등 그 어떤 봉사단체도 해외봉사를 가서 오로지 봉사만 하고 오지 않는다. 봉사자의 쉼 없이, 여유 없이 제대로 된 봉사란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돕는 일, 즉 봉사는 지속적인 관심과 힘이 필요하다. 잠깐 단기성으로 가는 건 냉정하게 말해 그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삶을 온전히 바꿔주지 못한다. 짧은 경험을 통해 봉사를 간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어려운 이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바뀌어 훗날 더 크게 도울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주는 경험이 단기성 봉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설령 짧은 봉사라 한들 쉼과 여유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경험과 내공이 쌓여서 지속적인 봉사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욕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실엔 관심조차 없고, 세금만 축내는 벌레들이 잘 죽었다며 비웃는다. 과연 오만가지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은 해외 봉사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일주일 동안 봉사를 가면 일주일 내내 봉사만 하고 오는지 묻고 싶다. 사람이 죽었다. 유가족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알아보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피상적인 기사만 보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잘못됐고, 고장 났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누군가 고통당하고, 죽어가는데도 공감하지 못한다. 누군가 함부로 뱉은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도 안은채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바쁘다. 우리나라 인터넷에는 정의로운 판사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그들의 신념은 아마, '나는 판단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 아닐까 싶다.